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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끝에 있는 너에게] 가고 말거야!

greensian 2019. 12. 2. 12:55




​나의 새에게,

햇살이 따뜻한 남쪽 섬에는 잘 도착했니?
벌써 네가 보고 싶구나.
너와 함께 보낸 지난여름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하지만 넌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떠나 버렸지. 왜 우리는 해마다 헤어져야 할까?

​이번 주가 지나면 겨울이 닥칠 거야.
모두들 굴이나 둥지, 땅굴에 밤과 도토리를 착착 쌓아 놓고 있어.
겨울잠을 자려면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통 생기지를 않네.

난 너한테 날마다 편지를 쓰기로 했어. 그러면 꼭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으니까.
바람이 내 편지를 날라다 줄 거야.

잘 지내, 나의 새야.

너의 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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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쓰고 그림.
이경혜 옮김. 키다리 출판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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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omeone unknown

사각사각 마음을 적어 내려간 밤이 언제였는지, 다정한 친구의 편지를 받아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책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보물상자를 열면 지난날 주고받은 편지와 쪽지들이 와르르 쏟아지겠지만, 굳이 지금 열어보진 않을래요. 오늘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써 내려가는 마음으로 지금을 끄적이고 남기고 싶어서요.


요즘 세상, 톡으로 안부를 건네는 것쯤 뭐 그리 대수인가요. 단 몇 초만에 보내지고, 상대가 읽었는지 아닌지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걸요. 디지털 문명의 일상에서 전화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선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데요. 종이 위에 손글씨로 꾹꾹 눌러써 내려간 손편지만의 감성은 그 어떤 메신저로도 대신하기 어렵습니다. 내면에 고인 감정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는 동안에 자신을 마주한 시간과 상대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 짝꿍 새가 그리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곰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받는 이 ‘나의 새’, 보내는 이 ‘너의 곰’ 이 글자들은 그냥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가 아니에요. 애정을 담아 너를 부르고, 나를 말하는, 세상 다정한 말이니까요. 현실에선 무뚝뚝하고 애교는 1도 없는 츤데레 스타일의 그 어느 누구라도(a.k.a me , 나라고 한다) 한없이 세심하고 다정하게, 따뜻하게 상대를 바라보게 되는 마법 같은 말이지요.


매일 새에게 말하듯 편지를 건네던 곰은 어느 날 큰 결심을 합니다. 세상 끝에 있는 새를 찾아가기로 말입니다. 이야기는 편지글 형식으로 새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그려져 있어요. 그림 하나만으로도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곰의 여행은 시작하는 것만으로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향성을 새겨줍니다. 곰은 앉은자리에서 새가 보고 싶다고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아요.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행운을 준다는 개암나무 열매와 고사리 베개, 호수 그림 선물을 털 속에 넣어 가기로 해요. 친구들이 그리울 때 하나씩 꺼내 보면서 마음을 달랠 거라면서요. 곰은 혼자서 나선 여행이 두렵고 낯설지만 한 걸음씩 앞으로 헤쳐나갑니다. 처음 보는 모르는 친구를 만나고, 초대에 응하고, 새롭게 배우기도 하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가며 외롭기도 하다가, 코를 간질이는 바람의 내음과 코코넛 향기까지 여행을 나서기 전엔 알 수 없었던 걸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끝은 어떻게 될까요.
과연, 곰은 짝꿍 새를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지 모릅니다. 그럼 주저하지 말고 앞에 있는 펜을 들어 끄적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지 싶네요. 그 누군가에 닿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을 자기만의 시간 말이에요.


책을 덮고 나서 문득 떠오르는 음악 한 곡이 있어요. 정재형 3집 앨범 <For Jacqueline, 2008>에 수록된 ‘Running’ 이란 곡입니다. 사실 그림책은 곰이 새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작가가 표현한 그림도 여유롭게 하나씩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느린 호흡으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데요. 그림책의 전체적인 흐름이 ‘Running’ 곡의 심호흡이 가빠지는 인트로와 닮았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다만, 그림책 말미에 다다르면서 제 시점에서 이 곡이 퍼뜩 떠오른 걸 보면 책에서 음악으로 자연스레 바통터치를 하게 됩니다. 아끼는 짝꿍 새에게 가닿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요.


다정한 그 누군가, 수줍게나마 내밀한 감정을 오롯이 새긴 편지, 기다리다 못해 달려가는 설레는 마음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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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다비드와 마리 꼬드리는 부부이다.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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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브런치 매거진
<그림책 한 조각>​​에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