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per + log

[놓치고 싶지 않아] _ essay

greensian 2019. 12. 21. 09:50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으로 점철된 밤을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돌이켜보면 아직 철들지한 자아에 비친 자화상에 불과했음을. 삶을 보는 관점의 축을 과거에서 현재로,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지점으로 옮겨 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끙끙대는 마음을 버리니 불안을 불안으로 간신히 버티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앞에 놓인 시간을 더 소중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seize the day.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이자 ‘카르페디엠’과도 같은 말. <놓치고 싶지 않아> 책을 다 읽고 난 뒤 이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무한 애정을 쏟으며, 눈 앞에 있는 아이들과 미술 활동을 통해 진심 소통하고자 하는 저자의 모습과 닮아서다.


이 책은 입시미술에서 아동미술로 길을 바꾸어 커리어를 쌓고 있는 어느 선생님의 진솔한 고백 에세이다. 저자는 미술에 대한 애정, 교육 현장에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기본으로 미술 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가치관과 소신을 자신만의 톤으로 풀어나간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수업 과정을 복기하고 그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포착해 포스트 잇에 기록하던 여러 순간들이 글감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날 그날 다른 아이의 감정을 헤아리고, 결과물보다 미술하는 과정에서의 순수한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입시미술학원에서 쌓은 경력과 경력으로 어느덧 나도 오너(owner)를 꿈꾸기 시작했다.’

책의 첫 챕터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자는 방문 미술로 출발해 지금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름 있는(?) 대형학원을 굳이 경쟁 상대로 삼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컨텐츠를 기획하고 실행해 나가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린왕자가 도착하기 전에 설렘과 행복감, 기대에 가득차 있는 사막여우처럼 수업하는 아이들이 오기 전 한 시간 전 부터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플을 굽고, 헬로윈 행사를 미술 수업의 연장선으로 기획하고, 해마다 연말 카드를 써서 보내고, 수십 번 수백 번 설명을 하는 일들...... 어쩌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관심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일을 사랑해서 시작하게 된 그러한 소소한 일들이 그저 즐겁고, 아이들이 좋아서 한다는 게 마음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아이들과 함께 크고 작은 일상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 자체가 예술 감성이 자동 장착된 삶 아닐까.

사실 아이들 머릿수만큼의 월급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알바, 시간제 강사들이 수두룩한 현실이다. 기술만, 보기에 화려한 테크닉만 전하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많다. 저자는 책에 ‘기술자와 교육자’라는 제목으로 I, II 두 번에 걸쳐 자신의 교육관과 철학을 강조한다. 결과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고, 아이들의 감성만큼이나 인성 교육도 중요하다는 교육관에 깊이 공감한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떼우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오너라는 자리. 그래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뭐지?’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져준다. 누군가는 한번 쯤 꿈꿔보는 ‘자기 사업’ 에 대한 열망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혹은 취업 전선의 현장에서도 충분히 대입해 볼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 + 덧붙이며,

1. 고백체로 쓰여진 담담한 일기같은 스토리의 전개에서, 저자가 글감에서 다루는 소재를 통해 미술 교육이라는 비슷한 길을 염두하거나, 진로를 고민하는 독자층,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들에게 분명 통할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2. 또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가 실 생활속에서 예술 감성을 체득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미술을 포함한 예술이 실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생활 가까이 있음을 한번 더 눈여겨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단 한 번의 공연이나 전시, 혹은 책 한 권이라도 중요한 건 아이의 눈이다. 애정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아무리 쏟아부어도 모자란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상에 대한 ‘관찰’, ‘눈 마주침’으로부터 시작되니까. (어제도 부르르 화를 참지못한 애미의 미숙한 모습을 또 한번 반성하며...) 그 반짝이는 눈망울과 마주하는 지금을 꼭 붙들어야겠다.

 

3. 입시 미술에서 아동 미술로 흐름을 이어간 배경이 자못 궁금해진다. 아이들과 호흡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에 아무리 교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서로간의 관계의 밀도(친밀감과 신뢰)가 교육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어린 아이일수록 감정 표현이 서투르고 자유로워 그들과 소통하고 감정 교류하며 탄탄한 관계를 쌓는 일이 쉽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교육 현장에서 즐겁게 아이들과 호흡할 수 있는 건 이전의 경력에서 쌓은 실전력은 기본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애정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글에서 긍정의 마인드가 전해진다.

4. 개인적으론 표지의 커버 이미지와 메인 카피에서 느껴지는 책에 대한 첫 인상에선 아이들과 소통하며 미술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 선뜻 연결되진 않았다.
물감으로 얼룩진 앞치마가 세상 좋은, 가장 자신이 빛나는 무기임을. 가장 좋아한다는 색깔, 오페라(분홍색)와 울트라마린(군청색)의 강렬하고도 깊은 물감의 감수성이 책의 이미지와 비쥬얼 면에서도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