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서문부터 푹 빠져드는 책들이 있다. 마치 영화 속 인트로 한 장면처럼, 독자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토닥이면서 함께 걸어가 보지 않겠냐고, 같이 가자고 이끌어 주는 다정한 손짓에 토 달지 않고 자연스레 동행하게 되는 책.
혹은 작가가 애정 해마지않는 특별한 누군가에게 남기는 헌사를 만날 때면 ‘specially thanks to’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부러웠다가 이내 작품을 선물로 남기는 작가라는 글 쓰는 사람 자체가 부러워지기도 한다.
<모래요정과 다섯 아이들> 에디스 네스빗의 서문이 그러했다.
TO JOHN BLAND
My Lamb, you are so very small,
You have not learned to read at all;
Yet never a printed book withstands
The urgence of your dimpled hands.
So, though this book is for yourself,
Let mother keep it on the shelf
Till you can read. O days that pass,
That day will come too soon, alas!
- Edith Nesbit [Five Children and It]
그리고 작가의 생애를 통틀어 일과 삶 전부를 관통하는 책의 서문. 호프 자런의 <랩 걸>의 프롤로그가 그렇다. 일과 삶을 대하는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자연스레 그 문장에 스며든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이파리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직업이다.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질문을 한다. 제일 먼저 나는 색을 본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초록색인가? 위쪽이 아래쪽과 다른 색인가? 가운데가 가장자리와 다른 색인가? 가장자리는 어떤 상태인가? 부드러운가? 뾰족뾰족한가? 잎에 수분은 얼마나 차 있나? 시들어서 축 쳐져 있는가? 주름져 있나? 싱싱한가? 잎과 줄기 사이의 각도는? 잎은 얼마나 큰가? 내 손바닥보다 더 큰가? 내 손톱보다 더 작은가? 먹을 수 있는 잎인가? 독소가 들어 있을까? 햇빛은 얼마나 받고 있나? 잎에 비가 얼마나 자주 내리는지? 병들었나? 건강한가? 중요한가? 하찮은 잎인가? 살아 있나? 왜?
⠀⠀⠀...
이제 나는 한 과학자로서 다른 과학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호프 자런, <랩 걸 Lab Girl>,프롤로그 11p중)
그간 내가 탐한 건성건성 느린 걸음의 산책은 그저 겉핥기에 불과했던 것. 초록이들에 대한 끝없는 탐구, 나열된 질문을 보면 이 사랑스러운 식물학자에 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매혹적인 질문의 연속.. 프롤로그만 보고 책 지름신이 강림했던 책.
*
앗, 그림책 소개에 앞서 책의 서문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스페인의 그림책 작가 ‘라울 니에토 구리디’의 그림책 [두 갈래 길]은 2018년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간결하고도 상징적인 이미지의 첫 표지 그림을 지나 면지를 펼치면, 독자들을 기다리는 작가의 서문이 새겨져 있다.
지난 너의 모든 길이 아름다웠기를
지금 걷는 이 길과 앞으로 걷게 될 길이
모두 눈부시길 바라며, ________ 에게
구구절절 시시콜콜 털어놓지 않아도 작가는 독자들의 그윽한 눈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그리고 미니멀하면서도 상징적인 그림으로 따스한 웰컴 인사를 올린다. 그 다정한 인사를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작가가 권하는 동행의 길에 같이 올라설 수밖에 없게 자연스러운 끌림에 서서히 빠져들었던 것 같다. 이 글 첫머리에 쓴 것처럼, 영화 속 인트로 한 장면처럼. 아니, 꼭 인트로가 아니어도 좋다. 최근 종영된 <동백꽃 필 무렵>의 드라마 마지막 한 장면- “당신 꽃 필 무렵”- 을 소환해도 충분히 어울리는 한 조합처럼.
사실, 난 이 첫 서문에서부터 바로 KO패 당했다. (좋은 의미로다가) 첫 장부터 너무 좋아서 책 마지막 장을 덮기가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글이 시처럼, 그림과 어우러져 있기에 난 이 책을 ‘그림 시’라고 정의하려 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하게, 잘 다듬어진 타이포들의 배열을 보다가 활자 사이를 가득 메운 배경 그림으로 시선을 옮긴다. 느려진 호흡으로 마치 누군가의(나 혹은 생각나는 그 누구든지) 인생길을 산책하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활자만 나열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감흥이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의 미를 독자에게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글보다 앞서거나 뒤로 처지지 않고 여러 이야기를 엮고, 해석의 여지를 두는 심플한 그림이 조화롭게 어울려 부담스럽지도 않다.
엄마가 되고 나서 하루하루 지루하고 참으로 더디다고 생각했던 육아 터널을 지나는 과거의 날들이, 한 때 꿈을 잃었다고 자책하던 설익은 젊음이, 유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이라는 길 위에서 내가 걸었던 모든 선택의 장면이 슬로 모드로 스쳐 지나갔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길만을 추억하지 않고 현재 걷고 있는 ‘지금의 길’에도 애정을 담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시종일관 들었고, 나를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 혹은 그 누군가를 위해 선물하기에 좋은 쓰임으로 다가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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