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씨의 의자」, 「고슴도치 엑스」,「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책청소부 소소」,「기차와 물고기」,「나는 봉지」 ... 노인경 작가의 그림책은 내가 좋아서 먼저 보기 시작했다가 아이도 서서히 물들어 좋아하게 되었다. 글이 없이 순수하게 그림만 담긴 그림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리뷰를 신청한 건, 기존 작품에서 접한 작가 특유의 감성과 이야기를 담은 그림에 이미 충분히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운 좋게도 덜컥 리뷰어로 선정되고, 책을 기다린 끝에 받은 배송 중이라는 문자는 왜 그리 또 설레던지. 그렇게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는 가운데 「숨」책을 처음 만났다.
숨방울이 뽀글뽀글거린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온 세상 앞에 호흡하는 아이. 파스텔 분홍빛 표지에 선명히 새겨진 파란색 ‘숨’ 글자가 반짝인다. 그림책 표지에서부터 벌써 따스함과 사랑이 스며든다.
“긴 기다림의 끝에 아이가 있었어요.
숨과 숨이 모여 그 아이가 되었고,
이제 그 아이의 숨으로 우리는 새로워졌습니다.”
_ 노인경(표지 뒤_ 작가의 말)
글 없는 그림책 「숨」은 표지 뒷면에 담긴 작가의 말이 이 책을 설명하는 첫 시작이자 전부이다. 그 이상의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이 부족한 리뷰라는 글이 어쩐지 조심스럽다. 결국엔 생명이 시작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매일 매일 지켜보는 부모와 아이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 무엇이 되었든 생명의 시작은 신비와 경이로움 그 자체로 기억된다. 생(生)이 시작됨으로 인해 생(生)이 달라진다. 이미 ‘함께’이기를 선언한 여자와 남자는 기존의 삶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존재로 부모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나기 마련이다. 생명이 찾아온 첫 날 평소와는 다른 이상 징후를 느끼고 병원을 찾고, 처음 심장 박동수를 듣고, 엄지손톱보다도 작은 땅콩만한 새 생명이 자궁 안에서 엄마가 먹는 것을 먹고, 엄마의 숨을 같이 쉬고, 바깥세상을 구경할 준비를 하며 성큼 자라 엄마 아빠에게 안기기까지, 예열의 시간은 늘 기다림이다.
“제 아이에게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어땠는지 자주 물어봅니다. 그 때 듣던 음악, 재미나게 읽은 책, 한여름 밤의 공원 산책이 배속 아기에겐 어땠는지 궁금했어요. 이 질문이 「숨」의 시작입니다.”
_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채널 예스 2018. 10. 01)
조심스레 표지를 펼쳐드니, 역시나 면지에서부터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면지는 프롤로그 겸 작가가 전달하고픈 서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열린 면지에 들어서면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거라고 말하던 어느 그림책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옅은 파란 하늘에 말구름이 둥둥 떠 있다. 엄마가 아이와 나눈 대화가 작가의 필체 그대로 적혀있다. 사실, 그림책 본문 안에 글이 없다 뿐이지, 글이 한 글자도 없는 건 아니다. 작가는 엄마와 아이와의 대화체 그대로를 구름 풍선말로 옮겨 놓으며 글 없는 그림책에 다 담지 못한 말을 수줍게 내미는 듯하다. 글자 한 톨도 놓치지 않으려 구름 속 대화를 읽어보며 구름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사실, 본문에 글이 없다보니 면지를 슥 넘기고, 그림의 주된 캐릭터만 슥슥 훑어보는 우를 범할 수가 있는데 되도록, 순간순간 멈추고, 또 멈추고를 반복하며 충분히 작가의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이다.
따뜻한 물 속으로 짐작되는 곳에 퐁~ 하고 들어온 아이. 아빠와 엄마가 부드럽게 헤엄쳐 아이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셋은 만나고... 후- 하고 여린 호흡으로 내쉬는 아이의 숨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점점이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손을 뻗어 춤추는 생명들에 작은 손을 뻗어 보며 엄마 아빠와 함께 아름다운 여정을 시작한다. 작은 물고기에서부터 뿔 있는 일각고래, 유유히 헤엄치는 연체류 생명이 가득한 곳, 물로 짐작되었던 공간이 한없이 큰 바다로 커지고, 아이는 또 다른 무수한 생명체들과 호흡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때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엄마와 아빠 품에 안겨 안정을 찾다가도, 예상치 못한 격랑 속에 휘청이곤 한다. 하지만 서로 손을 맞잡은 가족의 울타리는 경이로운 무한 우주로 확장된다. 꿈이었을까. 그저 상상이었을까. 눈을 비비며 꿈같은 여정에서 홀로 깨어난 아이. 온음표만큼 꽉 차게 숨을 쉬고 들이마시고는 “엄마!”하고 외치며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 * *
“ ‘숨을 불어넣는다’라는 말을 좋아해요.
마치 생명이 탄생하는 마법의 순간 같아요.”
그림 한 장 한 장에 담긴 이야기는 곧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모든 작품이 그러하겠지만. 작가의 손길을 거쳐 나온 작품을 통해 되돌아보는 생각의 여정엔 마침표가 없다. 표지를 보고,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고 마지막 면지에 이르고 나서야 곧 깨달았다. 그림을 넘길수록 숨 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책을 덮을 즈음에 숨의 간격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길고 깊은 호흡을 유지하고 있단 사실을. 요가 시간에 배웠던 대로 들이마신 숨을 잘게 잘게 오랫동안 뱉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숨을 거의 참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느 날 성큼 아기가 찾아와 심장소리로 화답하던 그 날, 뾰족 하이힐 구두와 안녕을 고하고 당장 플랫 슈즈로 갈아탔던 날, 마땅히 기다려야 했던 나날들, 고된 진통과 난산의 끝에 엄마라는 새 이름을 선물 받은 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야기 너머엔 결국 나의 이야기가 맞닿아 있었다. 함축적이면서도 모든 걸 담으려 노력한 작가의 선한 마음과 진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져 충분히 몰입한 시간이었다.
글이 없는 그림책 「숨」.
세상과 마주한 아이의 첫 숨을 기억하며...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 엄마, 아빠를 위한 그림 시(時)
인고의 시간 끝에 말간 아기 천사의 얼굴을 마주하고 자그마한 아기를 안아 들면, 온 우주를 품은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아빠가 그러할 것이다. 기쁨도 잠시라고 마냥 서툴기만 한 초보 엄마 아빠 앞에 육아 전쟁이라는 거대한 벽이 대기하고 있지만.
고된 육아에도 문득 문득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누군가에겐 백일의 기적이 백일의 기절이 되고, 틈틈이 엄마만의 쉼표를 찾아 헤매는 날이 이어지고, 찬바람에 감기 들까 무서워 아이의 숨소리 하나에도 예민해지는 날도, 아이의 숨에 한 음절 한 음절 실린 옹알이와 첫 말, 첫 걸음마의 감동도... 부모의 뜨거운 지지 속에 아이의 숨은 나날이 성장한다. 아이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의 합은 사랑이지 않을까. 숨과 숨이 살아 숨 쉬는 요일들, 그렇게 한 가족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막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듣고 아이를 기다리는 예비 엄마 아빠를 위해, 혹은 훌쩍 자란 아이의 모든 말과 움직임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더는 크지 말았으면 하는 시간에 당도한 부모를 위해, 딱 하나의 선물을 권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단연 이 책을 추천하겠다. 한 장 한 장 그림만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시간을 담아낼 수 있으니, 되도록 아주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작가의 그림을 만나보기를.
* 이 리뷰는 예스24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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