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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슬기로운 물생활이 필요해

greensian 2020. 12. 21. 23:14

 



출근과 등교로 분주했던 아침이 한 템포 느리게 숨을 고르고, 코로나 여파로 어린이집에 못 가고 가정보육 중인 둘째와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항 쪽에서 물이 흐르는 듯한 여린 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여과기에서 나는 소리겠지 싶어 가벼이 넘기곤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몇 분이 지났을까. 종합장에 색칠을 하다 말고 둘째가 “엄마! 여기 좀 봐! 여기! 어항! 물!” 하고 외쳤다. 아이가 부르는 쪽으로 가 보니 어항 오른쪽 귀퉁이에서 물이 모서리 선을 타고 졸졸졸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물은 바닥으로 떨어져 이미 흥건해졌고, 고인 물이 똘똘 뭉쳐 거실 바닥을 지나 패브릭 소파 쪽으로 흐르고 있던 중이었다. 몇 초만 더 지났더라면 패브릭 소파는 신나게 물을 빨아들이고 있었으리라. 상상하기 조차 싫은 순간이었다.

다급히 아이에게 외쳤다. “수건!! 수건 가져와!! 많이 많이!!” 아이가 다다다다 뛰어 욕실에서 가져온 네댓 장의 수건을 바닥에 던져 소파 쪽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 가장자리를 간신히 막았다. 문제는 어항 귀퉁이의 틈새로 계속 흐르는 물이었다. 나의 부름에 둘째가 여분의 수건을 더 챙겨 와 어항 받침대와 거실 바닥이 닿는 면에 ㄱ자 형태로 두툼히 깔았다. 어항에서 새는 물이 수건으로 차츰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항 귀퉁이를 살펴보니 살짝 틈이 보였다. 있는 힘껏 어항 옆면을 두 손에 체중을 실어 꾹 밀었더니 물이 새지 않았다. 모서리 틈새가 벌어졌던 게 확실했다.

하필 왜 오늘에서야 일이 터진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남편이 휴가 내고 집에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이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새하얗게 먹통이 되었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항의 틈이 더 벌어져 유리가 깨지고 물이 폭포수처럼 와락 쏟아지면 어쩌나 최악을 상상하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전화기를 가까이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출근한 남편에게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화면에 어항 상황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어항에서 물이 새! 이거 어쩔 거야? 물이 흘러서 소파 다 젖을 뻔했어...! 내가 지금 한 손으로 어항 밀고 있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고?”

“허얼......” 남편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항 새로 사야겠네. 오래되긴 했어. 10년 된 어항이잖아. 실리콘이 떴나 봐.”
“새 거고 뭐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하냐고!”

한 손은 전화기로 중계를, 다른 한 손은 틈새가 벌어진 어항을 꾹 밀고 있으니 심쿵 소리는 더 커지고 박자는 더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변주됐다. 덩달아 손도 덜덜 떨렸다. 이러다 정말 어항이 깨지는 건 아닌지, 그 난리통에 바닥과 가구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들이 생각났다. 오죽하면 남편에게 당장 달려오라고 소리를 질렀을까. 버럭 화를 낸 건 물 세계를 구현한 자가 당신이니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상황 앞에서 탓을 돌리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다. 버럭 하자마자 뇌는 상상의 회로를 끊어버리고 자동적으로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게 했다. 어쨌든 상황 수습은 나의 몫. 자, 그다음 단계는?

이성을 잃고 헤매는 내게 화면 속 침착한 남편이 말한다.
“일단, 신발장 옆 왼칸에 실리콘이 있어. 치약처럼 길게 생긴 거. 그거로 틈새 사이를 메꾼다 생각하고 그냥 덕지덕지 발라. 예쁘게 안 발라도 돼. 그냥 치덕치덕 대충 해 놔...”
하아... 난관이다. 둘째더러 실리콘을 가져오라 하기엔 어려운 미션이고, 내가 어항에서 손을 떼는 즉시 물은 졸졸졸 흐를 거고... 답이 없었다. 사면초가인 내 상황을 듣고 남편이 덧붙인다.
“그럼... 어항에서 물을 좀 퍼서 버려. 그럼 좀 괜찮을 거야.”
“아, 알았어. 일단 해 볼게. 끊어.”

*

왜 그 생각이 나지 않았던 걸까. 어항 옆 베란다로 향하는 거실 창을 열면 바로 고무 대야와 바가지가 있는데! 퍼 내면 될 것을, 바로 그거지!
왜 그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 1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인지. 생각할수록 바보 같은 나 자신이 못 미더워졌다. 이성적으로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탓도 크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 궁금한 적은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어항 물이 새거나 영화 <쉬리>처럼 어항 유리가 터지는 사고가 일어나면 어쩌나. 거실 살림과 콘센트 전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공상에 빠지곤 했으니까. 그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가상의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걱정거리를 자동으로 불러들이는 수고 따위는 하기 싫어 그 만일의 사태에 대해 대비하지 않았다. 눈 앞에 벌어진 예기치 않은 일은 바로 회피의 대가였다.

남편은 신혼 때부터 취미가 있는 삶을 꾸렸다. 사부작사부작 정사각 면체 어항 생태계를 구현하고 물생활을 즐겼다(당시는 1자 크기 - 30*30*30cm, 지금은 60*30*38cm로 두 배 커졌다) 그가 어항을 세팅할 때 나는 물고기나 수초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의견을 제시했을 뿐. 어항을 관리하는 건 철저히 그의 구역이고, 난 그저 보기 좋고 아름답게 잘 구현된 그 세계를 관망하는 제삼자이자, 소극적인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이 알아서 해결할 거라는 무관심과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려는 무책임감 사이, 보이지 않는 안전한 사각지대 어느 한 구석에 나 자신을 낮추고 숨고 있었는지 모른다.


* * * * *

여러분은 생각 없이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함께 생각하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에 얽매여 있습니다. (p.19)

여기 양쪽 중 여러분은 조용한 쪽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한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기대하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주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객체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언어극의 객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체입니다. (p.30)

_ 피터 한트케 | 관객모독
윤용호 옮김 ㅣ 민음사(2012)세계문학전집 306

* * * * *


(너무도 갑작스러운 전개일지 모르지만) 읽고 나서 내내 불편한 감정이 남아있던 <관객모독> (피터 한트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대 위의 잘 짜인 연극 한 편을 기대하며 끝까지 객으로서 남고자 하는 관객이 배우들이 다짜고짜 퍼붓는 욕지거리에 제대로 현타를 경험하는 그 장면 말이다. 남편의 어항은 내 취미는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 ‘살아 숨 쉬는 평온함’이라는 하나의 서정시를 담당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구현한 하나의 작고 평화로운 생태계를 온 식구가 ‘물 멍’하는 시간을 가지며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난 우리 집 어항에 어떤 기여도, 관여도 한 적이 없다. 아주 가끔이지만 물밖으로 다이빙 끝에 소풍을 끝낸 가여운 물고기를 발견했을 때,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덜덜 떨며 안녕을 고해주던일 말고는 아무튼 난 생명 앞에서 극소심하고 나약한 중생일 뿐이라 내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어찌 됐든 간에 내가 무지하고 소극적인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결혼이란 싫으나 좋으나 별 수 없이 공존의 무대이다. 두 아이가 합류하고 난 뒤의 슬기로운 가족생활에서 나뿐 아니라 남편 역시 각자의 취향을 스스로 의식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리다가 서랍 속에 묻혀버릴 뻔한 유물이 되고 만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주객전도가 되다 못해 육아와 살림, 일에 치여 살다 보면 ‘내가 뭘 좋아했던 사람이더라?’ 하며 공허감과 마주하는 쓸쓸한 장면에 갇힐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자신을 잃게 하지 않도록 나만 아는 또는 나만 즐기는 날갯짓이 필요하다. 나만이 숨 쉴 수 있는 아주 작은 리추얼, 또는 애정을 기울일 수 있는 공간 한편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니까.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히 바라고 틈틈이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항의 세계도 그의 감정이 투영된 취미 이상의 존재일 것이다. 어항에서 물이 샌 해프닝은 결혼 10년 만에 내가 그러한 각성을 하게 된 특별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은 이상, 어느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더는 관망하는 관객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

둘째에게 거실 창을 열어달라고 하니 고양이처럼 소파 위로 가볍게 튀어 올라 단숨에 문을 열어젖힌다. 난 대야에 있던 바가지를 한 손에 집어 들고 얼른 어항 물을 한 가득 담아 대야로 퍼 옮기기 시작한다. 왼손은 힘을 주어 어항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로만 어항 물을 퍼 담으니 균형감이 깨져 손이 더 후들거린다. 바가지에 한가득 담은 물이 좌우로 흔들리며 바닥에 깔린 젖은 수건 위로 뚝뚝 떨어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대야로 정신없이 퍼 나르니, 어항 모서리 틈새 아래로 수면이 낮아져 물이 새지 않는다.

물난리가 난 바닥과 물에 푹 젖은 수건들을 정리하고 난 뒤 신발장 서랍에서 실리콘을 꺼내왔다. 틈새가 약간 벌어져 있던 곳을 메우고, 혹시나 틈새 아래쪽으로 더 틈이 벌어지진 않을지 걱정되어 모서리 선을 따라 꾸덕꾸덕한 실리콘을 발랐다. 폭주하던 심장이 진정된 후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항 물 많이 퍼내서 더는 안 새... 너무 놀래서 심장이 다 벌렁거려. 아까 당장 오라고 한 거 취소야. 괜찮으면 오후 반차 내고 오라고... 혹시 몰라 실리콘도 발라놨는데 틈이 더 생길까 봐 걱정돼...”

남편은 오후 반차를 신청했고, 새 어항을 사서 빨리 귀가하겠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30여분이 지나고 어항을 확인해 보니 물을 퍼낸 뒤 낮아진 수면 아래로 아까보다 더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어항 틈새가 소리 없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임시방편으로 메운 실리콘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어항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가장 키가 큰 수초가 물 밖으로 노출되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면을 낮춰 물의 압력이 줄어들도록 하는 것 외엔.

고요한 아침을 깬 아들의 첫 제보가 있고 난 후, 5시간 여가 지나고. 남편이 새 어항을 들고 집에 도착했다. 두 팔은 무겁게, 발걸음은 위풍당당 가볍게.
결혼하고 10년간, 남편의 어항 물생활은 세 번의 이사를 하며 한 두 번의 크고 작은 이동과 재배치를 제외하곤 오늘처럼 물고기가 사는 집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처음이다. 가구와 가전도 아직까지는 큰 이상 없이 무탈해 쓰임을 연명하고 있는데 첫 스타트를 어항이 끊은 셈이다.

그날 오후, 밤까지 장장 7시간에 걸쳐 ‘어쩌다 어항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그 전에는 모든 게 그 혼자만의 작업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온 식구가 달라붙어 해결해야 할 진지한 프로젝트가 되었다고. (아이들은 물고기가 머무는 임시 거처에서 혹시 물밖으로 이탈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난 그의 보조를 자처하며 작업하는 동안 옆을 지켰다)




p.s
여전히 나와 아이들은 즐거운 관객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수행 중이다. 전과는 다른 게 있다면 어항 생태계를 보고 난 뒤 각자의 시선을 담은 제보가 많아진 것. 그리고 수초가 뿌리째 뽑혀 수면 위로 둥둥 떠 있는 순간을 이제는 나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 그의 입장에선 아내가 수초 심는 집게를 든 ‘영광의 순간’. 결혼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물생활 두 번째 시즌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 위 글은 브런치 매거진 2020.12.21 글입니다.
https://brunch.co.kr/@hyejung/72

지혜롭고 슬기로운 물생활이 필요해

10년 만에 어쩌다 어항 이사를 마치며, | 출근과 등교로 분주했던 아침이 한 템포 느리게 숨을 고르고, 코로나 여파로 어린이집에 못 가고 가정보육 중인 둘째와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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