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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이사

greensian 2018. 9. 18. 13:41

임금님의 이사
보탄 야스요시 글 • 그림 | 문학과지성사




미니멀리즘을 좋아한다. 하지만 잘 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절대 범접 불가한 신의 영역이다. 손댈 수 없으니,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니, 꿈꿀 수 있으니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한달 전쯤, 친정 오랜동안 묵혀있던 내 짐을 완벽히 처리할 기회가 있었다. 버릴 짐을 솎아내도 버리지 못하는 짐이 더 많았다. 책장 가득 채운 책도 다 정리하지 못해 결국은 우리 집으로 그대로 싸 안고 왔다. 20년도 더 지난 내 어릴 적 피아노와 함께......

특히나 손때 묻은 것들, 이야기와 시간이 고스란히 깃든 물건이라면 더 그렇다. 어릴적 성적표와 생활기록부,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와 엽서, 쪽지는 물론 유년시절의 일기부터 대학시절 다이어리, 사회생활 하는 동안 기록한 업무일지와 노트까지 다 버릴 수 없는 보물들이다. 무슨 미련이 있기에 싸안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물함을 열면 인생 드라마가 시작된다. 중국 상해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 중인 친구를 만나고, 4학년에 LA로 이민을 떠난 친구와 마주한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태권도를 가르치는 20대 시절의 외삼촌도 만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과거의 블랙홀로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18키로 말라깽이 1학년 내 모습과도 조우한다. 어리숙한 필체로 담겨 있는 내 사람들의 이야기 구슬들이 반짝거리고 종알종알 저마다 제 색깔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러니 내가 버릴 수가 있나. 언제고 꺼내볼 수 있는 보석들인데......

종이 재활용 박스에 넣어버리고 나면 그만일까. 그럼 좀 후련해지고 내가 짊어지고 다닌 짐 보따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걸까.
아니, 절대로 그러지 못할 나다. 종이 귀퉁이 어딘가에 적어놓은 그 무엇이든 들키는 것만 같아서 싫다. 장렬하게 까맣게 잿덩이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싫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결국은 끼고 있게 된다.

한번은 내가 정말 아끼고 아껴서, 단 한번도 버릴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노트 한 권을 내다버린 적이 있다. 티끌보다도 작아져 무력해진 어느 날이었다. 더 큰 내가 되지 못해서, 계속 갖고 있는 게 집착같아서, 버리면 잊을 수 있겠지 싶어 버리려고 모아 둔 헌 책 꾸러미 속에 단 한톨의 머뭇거림없이 노트를 내던지고 말았다.

생각을 지우려고, 새로 채워보려고 버렸다. 그런데 노트의 존재감은 커지고 더 커져서 분명 내다버린 노트를 미친 척 하고 다시 찾으려 온 방을 뒤적거렸다. 정말 내가 버린 게 맞는 건지 의심만 커졌다. 나중에는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을 뇌에 입력하고 착각의 구렁텅이 속으로 나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내가 노트를 버린 게 확실히 맞고, 이젠 책장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는 더 이상 노트를 찾지 않았다. 문득 생각에 나는 날엔 '없어져도, 없어졌대도 괜찮아. 괜찮아야만 해.'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쇠망치로 마음을 엄청 내리쳤다. 그래야 마음에 남은 불편함을 무디게 만들 수 있으니.

좀 더 시간이 흐르니 정말로 괜찮아졌다. 버리지 못해 끈질기게 집착 했지만, 노트의 부재로 인해 노트 속에 단긴 알맹이를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지나간 시간보다는 지금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버리고 나서 바로 찾아온 후회라는 감정에 직면하고 싸우는 동안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한 탓에
확실히 배운 건 있다.

버리기 전엔 신중하기.
버릴 땐 과감하기.
버리고 나선 뒤 돌아보지 말기.

•••••


부끄부끄해서 명령도 우물거리는 임금님과 말귀를 못 알아듣는 여섯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는 [임금님의 이사]

알고 보니 보탄 야스요시라는 오사카 태생의 일본 작가이다. 책 표지가 비단 천 문양처럼 고풍스러우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이다. 명지를 펼고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그림이 어찌나 곱고 세밀한지. '한 땀 한 땀' 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임금님이 꽃에 물을 주라는 의미로
"꽃에 물을...." 이라고 우물거리면
정원에 연못을 만들고,
흙투성이 당나귀를 보고
"예쁘게 해 주어라" 하고 말하면
예쁜 색 페인트를 칠해버리는 친구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날텐데, 우물쭈물 소통의 결과 일은 우쓰꽝스럽게 펼쳐진다.

여섯 친구들이 자는 침대가 어쩐지 비좁아 보인다는 생각을 한 임금님이 이번엔 커다란 침대를 만들라고 부끄럽게 명령을 내린다. 어떤 목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설명도 없다. 수줍어서 더 얘기를 못하기 때문이다.

명령을 들은 친구들은 어떻게 했을까. 임금이 더 큰 침대를 원하는 줄 알고서 세상 제일 큰 침대를 만들어낸다. 치명적 오류라면, 너무 커서 성 안으로 들어가지지 않는 침대다. 화를 내기는 커녕, 무안해진 임금은 갑자기 더 큰 성으로 이사를 가겠다고 한다.

뜻하지 않게 생각보다 큰 침대때문에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하게 된 임금님과 친구들. 뜻밖에 펼쳐진 여정은 어떻게 될까...?

발그스레 볼빨간 얼굴을 하고 빨간 망토를 두른 부끄모드 임금님은 세상 처음이다. 너무 수줍어 건네는 짧은 말 한마디엔 나름의 따뜻하고 큰 뜻이 숨겨져 있다. 늘 누군가를 바라본 뒤에, 자신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염두하고 꺼내는 말이기에 명령이 능하지 않지만 마음이 담겨있다.

신하가 아닌 친구들은 임금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앞뒤 재지 않고 열심이다.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친구니까 윗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나름의 아이디어로 몫을 해 낸다. 재미난 상상과 상황들이 벌어지고 모두가 흐뭇해지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임금님은 이사를 마치고 그 커다란 성에서, 미니멀리즘을 구현하게 된 걸까? ^^ 따뜻하고 묵직한 감동이 전해지는 이야기. 책 곳곳에 구석구석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그림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넘치고 넘친다.


p.s
숨은그림 한번 찾아보세요!
어디에 있을까요?

1. 햇님조차도 환하게 웃고 있어요. 어디죠?
2. 옷을 입혀주려는 친구들 중, 노랑색 휘장을 두른 친구는 어디에?
3. 책 표지의 문양이 있는 의자는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