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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을 빌려드립니다

greensian 2018. 9. 15. 16:34


고양이 손을 빌려드립니다
김채환 글 | 조원희 그림 | 웅진주니어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지구별에 정착한 어린왕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고
내가 품고 있는 거대한 우주에서의 하루살이가
버겁고 답답할 때마다 속으로 늘 말했다. 온전히 내 삶의 고단함을 우리 엄마에게 맡기기는 싫고, '이모님'이라는 고용된 관계도 어쩐지 불편하다. 그러니 '아내'가 딱이다. 나 대신 역할을 대신해 줄 '우렁각시' 말이다.

우주를 꾸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결혼하기 전엔 미처 몰랐다. 아니 둘이 살 때만 해도 몰랐다. 어느새 나 또한 삼시 세끼를 걱정하는 애미가 되고 보니 그제야 울 엄마가 생각났다. 도대체 어떻게 애 셋을 키워낸 걸까.

엄마는 가게 일을 하면서도 삼남매 도시락을 꼬박꼬박 싸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엔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일요일이면 동네 목욕탕에 셋을 데리고 다녔다. 너무 세게 빡빡 때를 벗겨낸 나머지 엄마의 손이 지나간 자리는 빨갛게 달아 올라 화끈거리지만 매끈한 살결만큼이나 어찌나 개운하고 시원했던지. 난 땀에 쩔은 두 녀석을 씻기고 나면 기가 쑹덩쑹덩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당시 울 엄마는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는데도 참 많은 일을 해 냈다.

난 울 엄마처럼 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내가 못하는 모든 일을 척척 해 내니까. 여전히 난 엄마 손을 빌려 식탁을 차린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된장, 고추장, 배추김치, 열무김치, 깻잎김치 등 기본 식재료와 김치 반찬은 모두 울 엄마표. 냉동실에 있는 멸치, 미역, 다시마, 고추가루 등도 엄마가 싸 주신 재료다. 나 또한 한 가정을 꾸려가는 엄마가 됐음에도 완전한 독립은 아닌 게다.

큰 아이가 돌을 치르기 전까지 내 몸은 좋고 나쁨의 패턴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늘상 쪽잠과 사투를 벌여야 하기에 생기는 만성 피로가 발단이었다. 에너지가 방전될 무렵엔 꼭 몸이 고장이 나다보니 아이랑 친정에 머무르며 울 엄마가 지어 준 밥을 먹으며 요양 아닌 요양을 하고, 완충 후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거듭 했다.
사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여덟가지나 된 병명을 진단받고 인큐베이터로 바로 옮겨졌다. 아이가 1주일간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있는 동안, 난 친정에 머무르며 자연분만하고 나흘 지난 몸으로 하루 두 번 허용된 면회 시간에 아이를 보러 병원에 가야 했다. 이후, 아이가 1년 간 병원에서 지정해 준 종합검진을 받을 때마다 매번 연차나 휴가를 낼 수 없는 남편을 대신 해 울엄마 아빠의 손을 빌려 병원을 들락거렸다. 다 커서도, 엄마가 되어서도 나의 우렁각시는 남편이기보다는 부모님이었던 거다.

•••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주부의 상징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능숙하게 계란 프라이를 하는 노랭이 고양이가 있다. 주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나름의 방법으로 몫을 해 낸다. 대가는 고등어로 충분하다. 단, 칼퇴만은 꼭 보장해달란다. 센스도 있고 믿음직하니 어찌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단 몇 시간만이라도 깨지 않고 푹 자면 좋겠다.
볕이 좋은 날 혼자 한가로이 좀 거닐면 좋겠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책 좀 보면 좋겠다.

엄마라면(어린 아이가 있어 늘 좌충우돌 초보엄마라면 더더욱) 공감할, 늘상 꿈꾸는 아주 아주 소박한 바람. 아주 사소한 소원을 들어줄 이는 과연 누군 걸까.

곱디 고운 단풍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공원에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거니는 아내의 그림을 보고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낙엽의 바스락거림, 노오란 계수나무 잎의 달콤한 내음, 파아란 구름만큼 가슴이 뻥 뚫리는 바람의 흐름...가을가을한 공기 속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가끔이지 내게도 노랭이 고양이처럼 나만을 위한 우렁각시가 있음 좋겠다.


p.s 같이 보면 좋을 책은,
엄마를 위한, 가족을 위한 그림책 계의 띵작!
앤서니브라운의 돼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