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_ 2018 서울국제도서전 신간 10 리뷰대회⭐️📚최우수리뷰 선정📚 (2018.10.12)
책 표지를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까지 저자의 발길이 닿았던 곳곳을 들여다보며 한 때 너무나도 동경했던 뉴욕, 그래서 서른에 도망치듯 찾아갔던 그 곳을 기억할 수 있어서 그 시간들이 좋았다. 경험치가 없었다면 마냥 동경하고 말았을 장면 장면을 내가 기억하는 경험을 대입해 볼 수 있어서 아마도 몰입이 더 되었던 것 같다.
남편과 아이들을 꿈나라 기차로 태워 보내고, 뒤따라 감기약을 먹고서 그 다음 기차에 올라탔어야 마땅한 가을밤이었건만. 환절기 감기로 휘청대는 몸을 붙잡고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건, 책을 통해 아주 오랜 동안 묵혀놓고 잊어버렸던 뉴욕병(좋게 얘기해서 동경이라고 해 두자)이 꿈틀대서였나보다. 내겐 이미 과거 속의 기억이 되어버린 뉴욕이지만 마치 이사짐을 정리하다 친구의 손편지를 발견하고 멍해지는 순간처럼,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 기억할 수 있으니 좋잖아. 그러니 기억하려면 기록해 둬야지 싶어 몇 가지 키워드 중심으로 사소한 끼적임을 시작해본다.
#This is New York
직장생활 14년차에 1년간의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졌을 때,나라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주저 없이 미국을 택했다. ...도시를 정하는 건 조금 어려웠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그 고민은 뉴욕대학교 미술사 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나를 받아주기로 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결되었다.‘뉴욕이 내 운명인가 보지’하고 멋대로 생각했다. (pp. 19 중에서)
신문사 미술기자 생활 14년차에 찾아온 자유의 시간. 뉴욕에 머무는 동안 누군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라고 권했지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해 보자는 목표를 세워 꽉 채운1년을 보낸다. 책은 막연히 화려할 것만 같지만 짧게나마 현지에서 '삶'을 경험한 입장에서 고군분투하며던 실제를 다룬다. 미술사학이라는 자신의 전공과 관심사를 기준으로 뉴욕 생활에서 영감을 받은 미술 작품과 귀감이 된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도시 저변에 대한 단상을 기록한다.
내가 이 책에 제목부터 끌렸던 이유는 뭘까 되짚어 보았다. 아마도 그건 어릴 적부터 이어진 일종의 해외병이 아닌가싶다. 11살에 절친의 가족이 LA로 이민을 떠나면서. 12살에 홀로 집에 남겨진 케빈을 보면서. 사춘기 시절, 막내 외삼촌이 태권도를 가르치러 유럽 비엔나로 떠나면서. 떠난 이들과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꼬박꼬박 손편지를 주고 받았다. 대학에 가면 꼭 배낭여행을 가고 말겠다는 꿈을 품은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대 초반 <프렌즈>에 빠지고, 후반엔 블링블링 반짝이는 뉴욕 도시의 캐리한테 반해버렸다. 대학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결정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떠난 곳은 영국이었다. 대학 때 절친이 먼저 어학연수를 떠난 곳이기도 하고, 같은 대륙에 친지가 있는 곳으로 마음이 기운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적 접한 세계명화집을 통해 그림을 좋아한 소녀가 고고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직업적으로도 전공을 이어가고, 낯선 미지의 도시로 떠나와서 자신의 관심 영역을 점점 확장하는 여정.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이 놀라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여러 대상을 접촉하면서 본연의 나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며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괴테의 글이 심장을 쿵 내리쳤다. 내가 뉴욕을 만난 건 만 서른을 앞둔 한 여름날이다. 깜냥보다 어려운 자리에서 일에 치이는 동안, 무조건 달달해야만 했던 신혼 1년의 시간이 실종되었다. 10년간 한결같이 옆에 있어준 사람과 함께 하기보다는 일에 얽매였던 시간이었다. 공연 기획사 일의 특성상 평일 저녁과 주말에 열리는 공연 준비를 위해선 완벽주의 성향과 트리플 A형인 난 꼼수도 융통성도 부릴 줄을 몰랐다.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지 못해 위태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병명이 불확실한 병에 시달렸다. 큰 방황 없이 지낸 사춘기가 서른에 들이닥쳤다. 늦은 방황이 시작되고 도망치듯 사표를 내고 뉴욕행 티켓을 끊었다. 당시 남편은 날더러 뉴욕병이라 했다. 내 인생 최대의 사치이자 일탈, 반항. 마침내 그 지독한 열병을 품고 향하고, 꿈은 비누방울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부풀어 올랐다.
# 몸치여도 괜찮아
오 너는 가장 어두운 날 나의 태양
내게 특별한 느낌을 받게 해
모든 순간을 천천히 천천히 맛보고 싶도록 해
- 루이스 폰시 ‘데스파시토 Despacito'
내 뉴욕 생활의 배경음악이었던 노래 한 곡을 고르라면 이렇게 시작하는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가수 루이스 폰시의 ‘데스파시토’가 아닐까 생각한다. 카페에서도, 라디오에서도, 클럽에서도, 길거리에 주차된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들리던 노래.무엇보다도 댄스수업에서 매번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고혹적이면서도 애잔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pp.73중에서)
저자는 뉴욕에서 춤을 배울 계획은 없었다지만 줌바댄스의 매력에 빠져 댄스를 진심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이 수업의 핵심은 춤을 즐기는 겁니다. 동작을 잘하는 건 그 다음이에요.”
댄스 강사 소냐의 말에 따라, 춤을 잘 못 추니 동작을 자세히 보려고 맨 앞줄에 서서 성실함으로 승부를 보았고 결국 무아지경으로 스텝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몸치인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대목이 바로 이거다. 나라면 수업에 일찍 도착한다 해도 부끄러워서 젤 첫 줄에는 못 설 것 같은데. 최근에 요가를 다시 시작하면서 강사 바로 옆자리가 비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가 앉아야 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을 때 일이 떠올랐다. 처음엔 거울에 비친 나를 직면할 수 없어서 시선을 빙빙 돌렸다. 그러다 후반부에 들어서면 어느새 몰입해 거울속의 나를 어색함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는. 그런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무아지경의 순간도 오는 거겠지.
#내게도 위로가 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뉴욕에서의 일상이 견고해져가자 에드워드 호퍼는 불식간에 내 삶 속에 스며들었다. 밤에 창밖을 내다보면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나는 자주 호퍼를 떠올렸다. (pp.59 중에서...)
저자는 뉴욕에 오기 전까지 호퍼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틴이 지겨워 떠나왔지만, 현지에 도착해 삶을 꾸려가는 초입에서 누구나 그렇듯 좌충우돌 나름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거치며 일상에 루틴이 자리잡아갈 무렵, 호퍼의 그림이 저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밤 시간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앞 건물, 옆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마주할 때 비로소 호퍼의 그림이 깊이 공감되었던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사와 연관지어 뉴욕이란 도시에 대한 강의에 참석해 호퍼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뉴욕을 상징하는 예술가 중 하나로 인식되는 호퍼의 그림을 다시 한번 마주해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가끔씩 깊은 밤에 널부러진 주방을 정리할 무렵에 건너편 동에 사는 사람들, 가족들의 움직임이 보일 때가 있다. 동간 간격이 꽤 널찍한데도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쳐있지 않은 집은 움직임의 풍경이 보인다. 폭염에 지친 어느 여름밤엔 잠 못드는 아파트 풍경이 그림책 <달 샤베트> 표지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던 적이 있다. 호퍼의 그림을 볼 때면 움직이던 나의 시선을 멈추고 보게 된 풍경과 그러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자신이 비친다. 저자가 그러했듯이. 뭐든 진심 내 이야기가 아니면 진정으로 온전히 닿을 수 없듯이, 불현듯 내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그런 순간이다.
수줍은 거인 호퍼와 정반대로 명랑한 성격의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아내 조세핀.호퍼의 뮤즈이자 모델이었고, 평생 동반자였던 그녀가 전망 좋은 남향 스튜디오를 남편에게 양보하고 북향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던 조세핀은 호퍼를 딜러들에게 소개해 주고, 결국 그가 성공을 거두는 데 공헌했지만 그녀 자신은 특출할 거 없는 평범한 화가로 남고 만다.나약의 호퍼 생가에서 호퍼가 조세핀과 자신을 그린 몇 장의 캐리커처가 전시돼 있는 것을 보았다. 눌변의 호퍼는 달변의 조세핀과 다툴때면 말없이 그림을 그려 식탁 위로 놓아두는 것으로 의견을 표했다고 했다. 그 그림 중 거미줄로 뒤덮인 이젤 앞에서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고 있는 조세핀을 그린 것이 있다. 그 그림 아래에 호퍼는 다음과 같이 썼다. ‘She wants to paint but she HAS to pick(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주워야만 합니다) 가사와 육아에 치여 재능을 접어두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졌다. (pp.65 중에서)
정작 책을 덮고 나니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잔상은 호퍼가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호퍼의 글과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 괜시리 코끝이 시려왔다.
너무 다 내려놓고 묻어놓고 온 지난 날을 후회하진 않는다. 한 때는 워킹맘이 아니어서 불안하고 자책했던 날들이 있었다. 엄마라는 삶을 살다 늙겠구나 싶어 헛헛한 날이 이어졌다. 결국엔 나를 강하게 하기 보다는 비교의 채찍을 휘둘러 나를 학대한 시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드문드문 일기 같은 부끄러운 글로 하루를 기록하고, 그림을 배우고, 어린이책 번역 공부에 관심을 쏟다가 다시금 엄마라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가장 최근까지도 꿈의 페이지를 접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 나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림책 모임에 나가고, 신간을 읽고, 원래 내가 하고팠던 일들에 점점 가까워지려 아주 조금씩 다가가는 중이다. 예열을 하는 중이랄까. 그래, 뭐든 워밍업이 필요하든 차분히, 잊고 살았던 내 색깔의 온기를 모아보려 한다.
# 뉴욕의 서점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책 읽는 사람'
뉴욕에 오기 한 달여 전 프랑스 출장을 갔었다.
...
창으로 센강이 내다보이는 서점의 2층 서가, 책상 위에는 브레히트와 네루다의 시집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담소를 나눴다.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센강 바람을 쐬며 시집을 읽었던 그날의 경험이 셰익스피어&컴퍼니를 '내 인생의 책방'으로 만들어주었다. 뉴욕에서도 그런 책방을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아거시를 발견한 그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후 나의 뉴욕 탐방에는 서점 순례가 끼어들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뉴욕의 서점들을 돌아보았다. (pp.179-180 중에서)
스트랜드 서점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점 한 군데. 가끔 뉴욕을 떠올리면 잊을 수가 없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친구는 스트랜드에서 컨버스백과 뉴욕필름아카데미 관련 책을 사고, 난 존 레논 책을 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점에선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거기엔 책을 읽어주는 사람, 그리고 책을 보고 듣는 아이들이 있었다. 서점 한 켠에 줄안경을 끼고 구연동화를 하며 책을 읽어주던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한 분과 엄마 아빠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기어 다니는 단계의 아이들이라 모두가 완벽하게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기, 징징거리는 아기, 엄마랑 속닥거리는 아기 등 다양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야기를 하고 듣고 놀고 즐기는 어른들과 아이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조용해야 할(!) 서점에서 이게 무슨일이지? 라고 싫어하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어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책을 읽고픈 사람은 각자 스낵바나 커피바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각자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참 따뜻하고 감동적인 풍경으로 기억한다. 그 때 난 아이가 없었는데도, 참관자로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 그리고, 저자의 발길 따라
내가 기억하는 뉴욕의 it-place
뉴욕에 머무른 약 이십여일 중의 반은 당시 미국 서부를 여행 중이던 친구가 마침 뉴욕으로 넘어와 함께 보냈다. 제일 먼저 찾아간, 아니 뛰어가다시피 달려간 곳은 센트럴파크. 우리 둘은 피크닉 매트도 없이 달랑 커피 하나만 들고 와 신발을 벗고 초록 잔디위에 철퍼덕 앉았다. 저자처럼 캐리가 한 대로 매그놀리아 컵케이크도 맛보았다. 뉴요커처럼(?) 매장 근처 벤치에 쪼그려 앉아. 생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달달함에 미치도록 쓴 아메리카노를 가져가길 잘했다며 깔깔거리며 달콤함에 취했다.(이 대목을 남편이 본다면 정말 치명적인 뉴욕병 맞다) 또, 메디슨 스퀘어 파크 안에 들어가 기나긴 대기 행렬을 뚫고 셱셱버거도 먹었지 참. 친구가 여행 일정 상 먼저 떠난 뒤에 나 혼자 한 번 더 갔던 기억이 있다. 집 근처 스타필드에 매장이 들어왔다고 떠들썩했을 때 내가 시선도 안 돌렸던 이유는 초록 이파리들이 하늘거리는 공원에서 맛본 그 때 그 맛이 1도 안 날 것 같아서.
# New York, such a beautiful disease
I can't remember what I planned tomorrow
I can't remember when it's time to go
When I look in the mirror tracing lines
with a pencilI remember what came before
...
New York City
Such a beautiful disease
New York City
Such a beautiful,
such a beautiful disease
- 노라 존스 New York City
뉴욕을 떠올리는 저자의 배경음악은 ‘데스파시토’지만 내겐 노라존스의 '뉴욕시티 New York City'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글귀 하나 하나가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노라 존스의 보이스도. 이 음악이 있어 난 또 다시 사치를 부리며 기억을 불러낸다.
서른, 그리고 뉴욕. 둘다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웠던 열병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가고 난 자리엔 치기어린 욕망과 회색빛 공기, 반짝거리던 공간의 기억들이 마치 슬라이드쇼처럼 펼쳐진다.
아니, 오히려 책을 읽고 나니 예전의 기억이 더 뚜렷해지는 듯 하다. 동경하고 좋아하고 꿈꾸었던 도시에 대한 기록된 책이었기에 나로서도 기억을 복기하는 시간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개된 그림과 예술작품들에 한번 더 시선이 머물고, 그 위에 내 기억과 생각을 입힐 수 있어서 흡족한 시간이었다. 책 리뷰를 마치고 나서도 기억을 위한 기록을 차근차근 하나씩 꺼내봐야겠다.
책장을 덮고 나니 제목이 새롭게 보인다.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저자처럼 나 또한 나답게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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