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순간을 영원으로 복기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던
세 권의 책을 꼽으며 올 한 해를 되돌아보려 한다.
노인경 그림책 / 숨
“긴 기다림의 끝에 아이가 있었어요. 숨과 숨이 모여 그 아이가 되었고, 이제 그 아이의 숨으로 우리는 새로워졌습니다.”
_ 노인경(표지 뒤_ 작가의 말 중에서)
글 없는 그림책「숨」은 표지 뒷면에 담긴 작가의 말이 이 책을 설명하는 첫 시작이자 전부이다. 결국엔 생명이 시작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매일 매일 지켜보는 부모와 아이의 이야기, 곧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어느 날 성큼 아기가 찾아와 콩닥콩닥 심장소리로 화답하던 그 날, 뾰족 하이힐 구두와 안녕을 고하고 당장 플랫 슈즈로 갈아탔던 날, 마땅히 기다려야 했던 나날들, 고된 진통과 난산의 끝에 엄마라는 새 이름을 선물 받은 날. 태어나자마자 품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두개골 골절, 폐렴, 기흉 등 여덟 가지나 되는 병명을 진단받고 곧장 신생아 집중 치료실로 가야했던 그 날. 하루 중 낮 12시와 오후 6시, 단 두 번의 면회만이 허용되는 그 곳. 정해진 시간이 되면, 낯선 별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뚝 떨어져 이제 막 아슬아슬하게 삶을 시작한 여린 아기새를 만나러 온 엄마 아빠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는 그 곳. 긴장과 걱정, 아픔과 안도, 인고의 기다림이 뒤섞여 온갖 감정이 풍랑이 일어도 희망을 품어야만 하는 곳. 그날 그곳에서의 첫 기억과 다행히 지금까지 너무나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그림책.
오직 그림만으로 함축적이면서도 모든 걸 담으려 노력한 작가의 선한 마음과 진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져 충분히 몰입한 시간... 이제 막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듣고 아이를 기다리는 예비 엄마 아빠를 위해, 혹은 훌쩍 자란 아이의 모든 말과 움직임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더는 크지 말았으면 하는 시간에 당도한 부모를 위해, 딱 하나의 선물을 권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단연 이 책을 추천한다.
윤종신 산문집 /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
노래로 이야기하는 사람. 2010년부터 지금까지 「월간 윤종신」을 통해 매달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고 있는 윤종신의 산문집. 단 두 줄로 자기 소개가 되는 사람. 프롤로그 에필로그도 담담해서 과하지 않아서 꾸미지 않아서, 알던 노래는 아는 대로 낯선 노래는 낯선 대로 느낄 수 있어서, 노래가 나오기까지 여정 그 사이사이를 거닐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읽는 동안 월간 윤종신 음악을 BGM으로 틀어놓고 두 번 세 번 가사를 음미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단상을 3분에서 5분 정도의 길이로 늘여놓을 수 있는 사람을 작사가라고 정의한 문장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일상의 늘임표를 지향하는 내 블로그 제목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두 어린왕자가 합류한 나의 일상은 온전히 책임감의 옷을 벗어 놓고 지내기란 쉽지 않기에, 바쁜 일상 틈틈이 찾아오는 나만의 시간엔 세상의 속도 따위는 무시하고 나만의 호흡과 흐름에 따라 되도록 천천히 더디게 거닐어도 괜찮다고 시그널을 스스로에게 보낸다. 처음엔 낯선 신호들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나의 뇌, 마음, 몸에게 습관처럼 노크를 한다면 그 또한 언젠가는 익숙함으로 자리해 나만의 속도대로 움직이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산문집에 기록된 노래 중 기억나는 곡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월간 윤종신] 최근의 노래들 중 2018년 1월호 ‘slow starter'를 뽑겠다. 잔뜩 날카로웠던 마음의 파도를 다독여주던 노래라서.
/ 너무 부족하다고 매일 메꾸려 했던 그 팔에 흐르던 땀은
증발하지 않아 차곡차곡 내 빈틈에 이야기들로 차 난 이제야
...
그 모든 순간순간 나만의 이야기야 멈추려 하지마
분명 날아오를 기회가 와 좀 늦더라도 내 눈가의 주름 깊은 곳엔 뭐가 담길지
궁금하지 않니 답은 조금 미룬 채 지금은 조금 더 부딪혀봐 /
가사가 유독 마음을 건드려 한동안 이 노래만 무한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꽤 오랜 시간동안 집착했던 쓸모없는 고민에 대한 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켜켜이 쌓아지고 쏟아지는 마음의 말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도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인생 선배를 만난 것 같아서.
곽아람 /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만 서른을 앞둔 여름, 뉴욕을 만나던 그 날을 떠올리며 저자의 발길을 함께 따라갈 수 있었던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올해 이 책을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받고 시작된 새로운 삶의 페이지는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엄마로서의 새로운 언어를 온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히며 새기는 시간은 그 전의 나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른 나로 단련하는 낯선 경험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신문사 미술기자 생활 14년차에 찾아온 자유의 시간 충분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며 뉴욕에서 거주했던 저자가 남긴 뉴욕이라는 도시 면면의 기록이 담긴 이 책은 한번쯤은 뒤돌아서서 되새겨보고 싶은 내 삶의 순간들 중 가장 치명적이었던 ‘뉴욕병’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회상할 수 있던 동기가 되어주었다.
내게 신혼은 10년을 한결같이 옆에 있어준 사람과 함께이기보다는 일에 얽매여 실종된 시간에 가깝다. 워라밸에 실패해 위태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늦은 방황이 시작되었다. 도망치듯 사표를 내고 뉴욕행 티켓을 끊었던 그 때. 아마도 내 인생 최대의 사치이자 일탈, 반항으로 기록되는 여행. 지독한 열병을 품고 도착한 그 곳에서 허황된 꿈일지언정 한번은 만나고 싶었던 도시였다는 이유로 환상의 꿈은 비누방울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 때 뉴욕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꾸역꾸역 회사 생활을 이어나갔을 수도 있고, 혹은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에 예상치도 못했던 전혀 다른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떠났기에 그 때를 그리고 지금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으니 후회란 1도 없다는 것.
책을 다시 꺼내드니 유난히도 마음에 오래 머무는 풍경이 있다.
“뉴욕에 오기 한 달여 전 프랑스 출장을 갔었다.
... (중략)
창으로 샌강이 내다보이는 서점의 2층 서가. 책상 위에는 브레히트와 네루다의 시집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담소를 나눴다.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센강 바람을 쐬며 시집을 읽었던 그날의 경험이 셰익스피어&컴퍼니를 ‘내 인생의 책방’으로 만들어주었다. 뉴욕에서도 그런 책방을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아거시를 발견한 그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후 나의 뉴욕탐방에는 서점 순례가 끼어들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뉴욕의 서점들을 돌아보았다.“
(179-180페이지 중에서)
요새 새롭게 생긴 관심사 중 하나가 동네 책방. 그리고 함께 책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대목이 유독 새롭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뉴욕 여행 중 우연히 들어간 어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점에서 줄안경을 낀 할머니 한 분이 한껏 여유롭고 미소를 품은 얼굴로 영유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곳은 책을 사러 혹은 보러 온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조용하거나 경직된 분위기의 공간이 아니었다.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스낵바나 커피 바 탁자에 앉아 제 할 일을 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무릎에 앉아 소곤거리거나 움직거리면서도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눈으로 귀로 따라가고 있었다.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서점으로 기억되는 그 풍경의 잔상이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요즘 책모임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낭독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한번, 짧은 10분이지만 내가 읽어주는 동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골똘하게 집중하는 1학년 아이들과의 시간도......
과거 어느 한때 잠시 머물렀던 뉴욕이라는 도시의 기억은 지금 내게 전혀 다른 에너지로, 내 삶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한다. 아마도 그게 책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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