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Last Night]
제임스 설터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2010)
* 책 속에서 ,
아내가 좋아할 물건을 찾아내기는 쉬웠다. 우린 취향이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취향이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난 항상 취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건 아마도 옷을 입는 방식이나 또는, 같은 이유로, 벗는 방식으로 전해지는데,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이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신경쓰이지 않던 작은 습관들이 나중에 거슬릴 때가 있는데, 우리에겐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다. 말하자면 신발에 들어간 자갈을 털어내는 일과 비슷했다. 우린 그걸 ‘포기’라고 불렀고, 이를 계속하는 데 동의했다.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문구나 식습관, 심지어는 제일 좋아하는 옷도 이에 속했다. ‘포기’는 그런 것들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걸 의미했다. 뭘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어도 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있었다. 욕실 세면대의 언저리는 언제나 물기 없이 닦여 있었는데, 그건 ‘포기’때문이었다. 컵을 들고 마실 때 안나는 이제 새끼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한 가지 이상 요구하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뭘 골라야 할지 쉽지 않았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에게 이것만은 하지 말아달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안도감을 주었다.
‘포기’ p.99-100 중에서
브룰 씨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보이는 공원 경치는 기가 막혔다. 겨울에는 앙상하고 탁 트인 풍경이었고, 여름이면 짙은 녹색빛 바다가 되었다. 아파트는 고급스러운 타워형 고층 빌딩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고상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입구는 엄숙하고, 웃지도 않는 도어맨이 있는 아파트에서 삶을 꾸리며 산다는 사실은 위안이 되었다. 희귀한 카펫과 비싼 가구를 들여놓고 가정부를 부리는 종류의 삶. 브룰 씨는 아파트 가격이 한창 뛸 무렵 90만 달러에 아파트를 샀는데, 지금은 그 몇 배가 올랐다. 실제로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을 정도였다. 아파트는 천장이 높고 오후 햇살이 깊게 들었고, 폭을 넓게 짠 문엔 놋으로 만든 화려한 손잡이가 달렸다. 그리거 깊숙이 몸을 묻을 수 있는 안락의자가 있고, 테이블 위엔 꽃과 액자가 가득했고,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귀고리’ p.107 중에서
아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고,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앉아 있었다. 가십을 얘기하고 아부를 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끝없는 대화였다. 그는 펀치와 비슷하게 생겼다. 매부리코에 턱 끝이 올라간 얼굴이었지만 웃음이 순박했다. 행복으로 가득했지만 한계를 아는 종류의 행복이었다.
‘플라자 호텔’ p. 136중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손에 맡긴 채. 그 앞에 거대하고 희끄무레한 호텔이 있었다. 널찍한 계단을 올라갔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꽃이 놓인 로비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까지, 컵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귀에 들렸다. 동물이 된 것처럼.
‘플라자 호텔’ p. 148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녀가 말했다. 삶과 그리고..
-뭐?
-삶과 사는 척하는 것 중에 말이야. 모르는 척하지마. 당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는 뜻하지 않은 분노를 느꼈다. 사냥은 끝났다고, 그는 생각했다. 끝날 것이다.
‘방콕’ p. 164중에서
-소박한 가족과 멋진 책들. 그래 그럼. 당신은 기회를 놓쳤어. 바이, 바이. 가서 애 목욕이나 시켜. 당신의 어린 딸.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그녀는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봤다. 앞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진열장을 지나 문 쪽으로 가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내 문이 닫혔다.
물이 찬 방에서 수영을 하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갑작스런 밀물처럼 과거가 그의 몸을 떠밀고 지나갔다. 예전처럼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기억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몰두하는 게 최고였다. 그녀의 피부가 어땠는지, 실크 같은 그 피부가 생각났다. 아예 얘기조차 말았어야 했다.
부드럽게 눌리는 자판을 조용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잭케르악, 타이포로 쓰고 서명(“잭”), 1장, 여자친구인 시인 로이스 소렐스에게 보냄, 줄 간격 1줄, 연필로 서명함, 접은 자국 약간.
이런 게 사는 척은 아니었다.
‘방콕’ p. 167 중에서
어떤 기억은 갖고 가고 싶다고, 마리트는 생각했다. 월터를 만나기 전 어렸을 때의 기억. 집, 이 집이 아니고 그녀의 어린 시절, 침대가 있던 원래의 집. 그 오래전 겨울 눈보라를 바라보던 층계참에 난 창문, 허리를 굽혀 굿나잇 키스를 하던 아버지, 램프의 불빛에 손목을 비추며 팔찌를 차던 엄마.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동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어젯밤’ p. 186중에서
* 설터와 함께 영화 <다운힐 레이서>를 작업했던 로버트 레드포드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설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어쩌면 이 말이 설터의 스타일을 가장 시적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잎맥만 살리는.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본질적인 사실을 설터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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