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
꿉꿉하고 습한 장마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있다.
근래 들어 이렇게까지 ‘장마다운’ 해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6월 중순 무렵도 아니고 보통 때라면
쨍쨍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피해서 휴가를 고민할
7월 말인데. 하기야, ‘보통 때라면’ 혹은 ‘평소대로라면’ 이라는 말은 포스트 코로나를 통과중인 지금
아무 의미없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비가 오고 습한 날이면 뼈마디가 쑤신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내 얘기가 될 줄이야. 요 며칠 뒷목과 어깨,
양손 팔이며 손 끝 마디 마디가 뻐근해 틈 날때마다 요가를 모방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달래던 중이었다. 종아리 아래는 딴딴하게 뭉쳐서 천근만근... 습한 날씨에 장판 바닥에 발을 디딜 때면 쩍 쩍 달라붙는 소리에 나무로 된 마루였으면 좀 나았으려나 잠시 생각했다.
*너님은 아플 예정인데요.
몸이 피곤하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던 게 확실하다. 설거지를 하며 차가운 물에 그릇을 헹굼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원래도 선풍기와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지만 활동량이 많은 두 녀석때문에 최대한 약하게 켜놓는데도 살갗에 스치는 바람에 유난히 예민해진 적도 많았다. 스트레칭을 해도 해도 풀리지 않는 기분 나쁘고 불편한 이물감. 아침에 일어나 공복에 마시는 물이 상쾌하지 않고 씁쓸하고, 오후 무렵 노곤함을 떨치려 찾은 믹스 커피는 입안에서 껄끄럽게 겉돌았다. 카페인마저 거부하는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 이 모든 게 전조증상이었나보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던 건 주말이 지난 월요일 오후 혼자서 장을 보고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왔던 일이 화근이 된 것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다짐육과 국거리 고기, 알이 굵은 감자와 참치캔, 큰 아이와 둘째가 당부하던 복숭아와 팬케이크 가루, 계란 한 판 등... 결코 가벼울 리 없는 식재료들... 그 날도 비소식에 장우산까지 들고 있었는데 다행인 건 비가 잠시 멈춘 상태라 펼쳐들진 않았다는 것. 비가 내렸다면 장바구니 하나는 필히 어깨에 동여 맨 그 팔로 우산까지 써야 했으니 여튼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그러나 비루한 내 두 팔이 감당하는 하중을 넘어선 장바구니였기에, 집으로 걸어오는 10 분동안 서 너 번은 멈추어 서서 양 손에 쥔 장바구니를 바꿔서 들어야 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다짐육을 반반 섞어 수제 함박 스테이크를 만들고 미역국을 끓여내어 저녁을 한 상 거하게 차려내니 하루가 저물었다. 통증은 이틀이 지난 오후무렵부터 시작됐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 탓에 축축 쳐지고 무력감에 휩싸였는데 몸뚱이가 주는 신호 역시 그닥 쾌하지 않았다. 다소 불길했다고 해야하나. 밤새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게 끙끙대고 식은땀에 흠뻑 젖어 아침은 불쾌하게 시작됐고 전에 없던 등뼈 허리쪽도 뻐근함 이상의 불편함이 더해졌다.
날씨 탓이겠거려니 하고 하루를 버티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없다. 일단 일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꽤 오래 하고 머리도 시원하게 감고 나왔으나 여전히 몸이 으슬으슬 기력이 없는게 확실하다. 몸살이 난 것이다. 37.2도. 다행히 열은 없는 것 같아 안심이 된 건 요즘같은
민감한 시국에 발열과 근육통은 느껴서는 안 되는 증상이니까. 몸을 너무 무리하게 다룬 요 며칠이 떠올랐다. 그 날 장을 보면서 욕망(?)을 버리지 못한 미련한 여자의 최후는 이렇게 몸살앓이로 귀결되는 것.
근육통 진통제 한 알을 털어놓고 밤새 뒤척이느라 충분히 자지 못해 부족한 수면을 채우려 아픈 몸을 뉘였다.
30여분이 지나자 스르르 잠에 빠졌다. 천근 만근 몸은 가벼워지고 잠은 달았다. 12시 반 무렵, 원격수업을 끝낸 아이가 점심을 기다린다. 입맛도 없는 와중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버겁다. 침대에 누워 기대어 생애 처음으로 삼계탕 배달을 주문했다. 먹고 살자, 기운부터 차리자. 그 생각뿐.
*한여름, 몸보신하셨습니까 라고 몸이 묻는다
워낙 닭죽을 좋아하는 아이는 닭 국물을 호로록 잘 마셨고, 닭고기 살도 냠냠 잘 받아먹었다. 닭 해체를 거들던 나도 살코기를 소금에 착 찍어 양파 장아찌를 올려 입에 넣었다. 국물에 밥을 석석 말아 새빨간 깍두기와 함께 한 입 크게 넣었다. 약기운인지, 영롱한 삼계탕의 마법탓인지 몸이 한결 개운하고 가벼워졌다. 몸이 축났던 걸까. 입맛이 없던 요새 엄마의 열무김치가 좋다고 너무 채소만 버무려서 밥을 먹었던 탓일까. 보신이란 이런 것. 그러니까 요는, 잘 먹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것.
평소와는 달리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니 잠시 햇살이 들이친다. ‘수건!!!’ 마음 속 노동 요정들이 자동적으로 앞다투어 알람을 울려 제낀다. 세탁기를 돌리지 못해 며칠 동안 쌓인 수건 세탁물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힘을 내어 세탁기를 돌리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믹스 커피는 아직 무리일까 하다가 아무래도 카페인이 당긴다. 물을 끓여 커피 가루를 녹이고 얼음 풍덩! 조금씩 천천히 한 모금 넘기니 이제사 정신이 차려진다. 어제 저녁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어 책장을 넘긴다.
블로거 단어벌레 님(라문숙)의 글을 읽다가 눈에 물이 아롱아롱 차올랐다. 비는 멈추고 잠시 해가 반짝. 짧게나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순간 글이 나를 토닥여준다. 그냥 잘 지내고 있냐고. 이렇게 있어도 괜찮다고.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_ 전업주부입니다만 (라문숙, 2018 , 메가스터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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