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per + log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greensian 2024. 6. 22. 01:33


늘 애들 책상과 거실 책상만 쓸고 닦다가
먼지 뽀얗게 쌓인 채 어수선하기만 했던
내 책상을 정리했다. 버릴 것들을 솎아내면서도
절대 미니멀리즘은 못 되겠다 싶고, 뭘 이리도
이고 지고 못 버리고 사는지 한탄하다가도, 절대 버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나름 정리 의식을 치르다보니 하루 반나절이 다 지났다.

그러다 발견한 책 한권, 시 한 편.
글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정말 시는 주인을 찾아가는 걸까….?

류시화 시인의 명시모음집 [시로 납치하다] 중에
수록된 시 ‘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 가는 일
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
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
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팻 슈나이더
_ [시로 납치하다] 수록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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