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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greensian 2018. 8. 20. 17:27


재미나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책은 아닙니다.
한 페이지에 한 줄 정도 짧은 글이 민들레 꽃 그림을 배경으로 카피처럼 이어지는데요. 전개되는 스토리도, 반전도, 결말도 특별할 것 없는 그냥 민들레 꽃 그림책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글과 그림을 천천히, 느릿느릿 음미하고 되도록 소리를 내어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자신이 플레이 기능이 탑재된 기계라고 여기고, 최대한 느린 모드로요. 나지막이 나의 목소리로 책을 직면하는 꽤 괜찮은 시간이 되기도 하지요.

며칠 전 서점에서 겪은 일입니다. 세상의 속도도 빠르고, 신간은 쏟아지고, 누군가는 계속 성장하고 변화하는데 그냥 저만 제 자리에 멈추어 있구나 싶더라고요. 뒤쳐짐의 느낌은 그저 사소한 감정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피어오르는 진한 무채색을 잔뜩 머금은 먹구름처럼 저를 향해 무섭게 다가와 공포로 압도될 지경이었지요. 순간, 원래의 제 모습은 구름에 가려지고 닳아 없어지고,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 때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도망치고 싶다. 숨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 미치도록 혼자이고 싶다......' 저만 들어갈 수 있는 고요한 방으로 들어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었지요.

그 때 위로가 된 책이 [민들레는 민들레]입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론을 다루는 그 어느 책보다 단순하지만 묵직한 울림이 전해져서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나니 어느새 제 앞을 가로막던 공포의 걱정 먹구름은 말없이 사라지고 제 모습도 말갛게 선명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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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민들레
싹이 터도 민들레
잎이 나도 민들레
꽃줄기가 쏘옥 올라와도
민들레는 민들레

...(중략)

꽃이 져도 민들레
씨 맺혀도 민들레
휘익 바람 불어 하늘하늘 날아가도
민들레는 민들레




책갈피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글귀와 어우러지는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짧지만 건강하고 단단했어요. 언제, 어느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던 간에 ‘당신은 당신입니다’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지요. '자신이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 들던 것도 당신입니다. 조용한 방에 들어가 숨고 싶던 모습도 당신입니다. 그럴지라도 잘못된 건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당신이니까요.’라고 마음에 깊은 댓글을 새겨주는 듯 했어요.

온전히 제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에 자꾸 원치 않는 쉼표가 생기다보니, 그간 돌보지 않아서 켜켜이 쌓인 마음 속 짜증이 화산처럼 솟구쳐 올라왔나 봅니다. 내 안에 있는 ‘나 다움’을 무시하고 무작정 타인과 세상과 비교하고 자꾸 자신에게 딴지를 걸어 저를 못난이로 다루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거든요.

내 안의 자아가 좀 더 단단하게 설 수 있도록 저만의 시간을 좀 더 집중하며 귀하게 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 준 책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 불가한 나다움, 내 안의 힘을 직면하고 다루는 일이 제가 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별한 미션일테니까요.


2018. 08. 20

- ‘사유하는 그림책’ 동아리에 공유한 글 일부를 다듬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