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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greensian 2018. 8. 27. 17:45

암거위 피튜니아 이야기 l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PETUNIA TAKES A TRIP (Knopf, 1953)


Roger Duvoisin
로저 뒤바젱 그림∙글 l 서애경 옮김

나의 서툰 그림은 블로그 제목처럼 늘 느리고 더디다. 스케치할 땐 선 하나에 주저하고, 채색할 때의 머뭇거림은 느림의 속도를 한없이 늘어지게 붙든다. 그런 탓에 완성하고도 미완의 느낌이 강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취미 삼아 그리는 거라서 큰 욕심은 없지만 멋진 그림책을 만났을 땐 대리만족과 동시에 즐거운 쾌감이 느껴져 갖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책 모임에서 ‘휴가’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표지 그림에 반해서 고른 책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피튜니아가 저 위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책 표지와 시원시원한 색감의 그림들을 보자마자 바로 소장각!

작가 로저 뒤바젱(1904~1980)의 자유롭고 대담한 그림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동물 캐릭터의 표정과 동작 하나 하나 섬세하게 다룬다. 책의 색감 또한 기분 좋아지는 톤으로 단순하면서도 강약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글밥의 양도 상당한데 이야기꾼이라고 할 정도로 내용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대단하다. 작가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기에 이야기를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독자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낸 작가의 능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농장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바라보느라 거위 가족의 시선은 늘 하늘을 향해 있다. 비행기가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부동의 자세로 은빛 비행기를 바라본다.


​“저건 어디서 왔어요?”
“저건 어디로 가나요?”
아기 거위들이 묻자 엄마 거위 피튜니아가 답한다.
“저건 아주 먼 데서 날아온단다. 그리고 저 하늘이 펼쳐진 데까지 아주 멀리 날아간단다.
저 멀리에는 틀림없이 멋진 세상이 있을 거야.”

어느 날, 피튜니아는 가족 앞에서 선언을 한다.

“나 좀 보렴! 나, 비행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서
저 산 너머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보고 올 거야.
내가 얼른 보고 와서 얘기해 줄게.”

과연 언제부터일까. 피튜니아가 마음속에 날고 싶다는 꿈을 품은 순간이 언제 피어난 걸까. 자신의 꿈을 입 밖으로 말로 표현한 순간부터 피튜니아는 행동하기 시작한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려고 기를 써 보지만 허탕이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기 일쑤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빠 거위 찰리의 한 마디.

“난 뭐가 문제인지 알아. 당신은 나만큼이나 뚱뚱하거든. 가서 저울에 올라서서 한번 봐.”

뚱뚱한 거위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찰리의 말에 피튜니아는 마음을 먹고 한 번 더 선언을 한다.

“미용 체조를 열심히 해야겠다.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질 때까지.”


여행은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피튜니아는 가슴에 꿈을 품는 순간 시작되고 운동을 하며 더욱 구체화된다. 생각을 곧장 ‘액션!’으로 옮기고는 마침내 암탉처럼 날씬하고 튼튼한 몸을 만들어 날기 연습에 돌입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날아오르고 만다.


​조그만 농장 위로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산 위로도... 아래에 있는 땅이 부드러운 녹색 양탄자처럼 보일 때까지,
농장 집 주변에 있는 그 모든 것이 빨갛고 하얀 점으로 보일 때까지 높이 더 높이.
온 하늘에는 피튜니아 혼자 뿐이었어. 하늘을 나는 일은 정말로 멋졌지.


하늘을 날았다는 기쁨도 잠시, 생각지도 못했던 먹구름과 번개가 피튜니아 앞을 가로 막는다. 길을 잃고 표류하다 피튜니아가 내려앉은 곳은 건물과 사람들과 차들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의 사거리. 처음 보는 낯선 공간에 피튜니아는 겁부터 난다. 하지만 친절한 경찰과 택시 운전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도시 곳곳을 구경하게 되고. 시골에서는 보지 못한 도시의 동물원 앞에서, 언덕만큼 커다란 배 앞에서, 태산처럼 높은 건물을 앞에서 점점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피튜니아는 이젠 어찌나 주눅이 들었던지 자기 자신이 아예 통째로 없어져 버릴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어. 이 그림에서는 피튜니아를 찾을 수 없지. 여기서 피튜니아는 너무나 조그마해서 우리 눈에는 안 보이거든.

그래서 피튜니아는 정말로 자신이 안 보일 만큼 조그마해진 줄 알고 걱정했어. 피튜니아는 당장 시골로 돌아가야만 했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조그마해져서 진짜로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잖아.



설렘으로 가득했던 시간도 어느새 목적지에 닿으면 우리 또한 낯선 세계에 첫 발을 담그며 여행은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서 설렘은 감탄과 즐거움으로 바뀜과 동시에 이방인의 시선으로 자동 전환되어 이따금 느껴지는 외로움과 두려움도 감내해야 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대자연의 앞에서, 또 어떤 이는 이질적인 언어 앞에서, 또 다른 이는 다른 문화와 환경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자아를 만나고 적응하는 자신을 보며 한 뼘 자람을 느끼기도 한다.


피튜니아는 자신의 모습이 닳아 얿어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다가 경찰 아저씨의 아파트에 도착한다. 창 문턱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고 있는 자그마한 참새를 보게 된 피튜니아는 자신이 좀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참새에게 시골에 가면 더 행복할 거라고 참새를 걱정해 보지만 참새의 생각은 다르다.


“난 시골이 싫어. 빵 부스러기가 있는 창문이 많지 않잖아.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난 여기서 잘 살고 있어.”


경찰 아저씨 부인에게 맛있는 음식과 푹신한 잠자리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피튜니아의 표정은 어딘가 외로워 보인다. 다시 집이 그리워진 것이다. 피튜니아는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자신의 집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경찰 아저씨 부부는 그런 피튜니아의 마음을 눈치 채고 기차역으로 데려다 준다.


처음 하늘을 날아 오를 때도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혼자다. 도시에선 한없이 작아졌던 피튜니아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풍경을 바라보며 점차 자신의 크기가 원래대로 돌아옴을 느낀다. 생각의 크기도 점점 차올라 피튜니아의 감정은 외로움에서 행복으로 전환된다. 한껏 여유로워진 표정과 자세로 여행의 말미를 즐길 줄 알게 된 걸까.


“집에 돌아가니까 좋다.”

이 한 마디로 내 마음도 그렇게 평온해질 수가 없다. 푹신한 의자에 철퍼덕 몸을 뉘여 집을 찾게 되는 순간의 포근함이란.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편안해지는 그 시간은 나도 모르게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이 최고야’라는 안도감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감싸 안아준다.

우린 언제고 집을 떠나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둥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번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여행 내내 피튜니아는 가족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집에 가족이 기다리고 있음은 어쩐지 또 한번 가슴이 설레고 벅찬 일일지 모르겠다.


찰리와, 정상적인 크기의 목장 친구들이 모두 조그만 마을 기차역으로 나와서 피튜니아를 반갑게 맞아 주었지.
그날 밤에 피튜니아는 정상적인 크기의 집에서 행복하게 잠이 들었어.

얼마 뒤에 피튜니아는 아기 거위들에게 산 너머에서 보고 온 아름답고, 커다랗고, 또 커다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이제 피튜니아는 더 이상 날지 못했던 거위가 아니다. 다시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말하는 대로 꿈을 실천할 수 있는 거위가 되었다. 아기 거위들에게 오래토록 전해줄 이야기 거리를 풍성하게 갖고 있는 엄마이다. 가족과 주변 친구들 또한 한 뼘 자란 피튜니아의 모습을 보듬는 존재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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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로저 뒤바젱 Roger Duvoisin​​​

* 피튜니아 시리즈 Petunia Series
Petunia
Petunia's Christmas
Petunia, Beware!
Petunia I Love You
Petunia Takes a Trip
Petunia's Treasure
Petunia and the Song

국내에는 시공주니어의 네버랜드 세계의 걸작 그림책으로, 암거위 피튜니아 이야기 1편 [피튜니아, 공부를 시작하다(Petunia)] 와 2편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Petunia Takes a Trip)] 총 2권의 책이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