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굿 모닝-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 거울 속의 나. 거울 속의 눈을 한참 바라본다. 지난 주말 2박 3일간 아이 낮잠 이불을 만들어보겠다고 비루한 실력으로 강행군을 한 탓인가 얼굴빛이 퀭하고 눈이 좀 뻑뻑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검은 두 눈동자가 말을 건다.
"안녕?"
응답하듯 눈을 무심하게 깜빡 거리다 눈동자를 한바퀴 돌려 크게 떠보니 새빨갛게 핏줄이 알알이 뭉쳐 옆으로 긴 구름모양을 하고 그위에 무거운 눈꺼풀을 덮고 있다. 10여년간 렌즈를 끼고 산 나로서는 (요즘은 거의 안경을 많이 꼈지만) 이런 충혈은 난생 처음이다. 피곤에 지친 엄마의 눈 속 작은 점 같은 살핏줄은 봤어도. 덜컥 겁이 난다. 오늘은 안과행이구나.
오늘부터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처음으로 낮잠을 자므로 오후 4시까지 온전히 나만의 시간. 빌려온 책들을 읽고 주말 사이 쓰지 못한 글을 써야지 하고, 카페에 가서 달달한 바닐라 프라푸치노 한 잔 할까 생각이 많았는데 안과행 스케줄이 새치기를 한다.
아참. 그 전에, 손수 만든 낮잠이불 개시하려면 빨아서 바짝 말려야하고 바구니 가득 찬 흰 빨래들도 같이 세탁기에 돌려야지. 밥을 챙겨먹고 낮잠이불 제작일지를 간단히 기록해 사진을 올리는 사이, 세탁완료 알림 멜로디가 그 다음 스케줄을 말해준다. 불볕더위에 지친 여름날이지만 이불말리기엔 이만한 날씨도 없다.
주말 사이 친정에서 DIY Bedding Project를 진행하느라 집을 비운 사이 베란다에 거처를 둔 자스민 화분 두 종류에 꽃이 피었다. 하나는 남아있던 꽃망울을 거의 다 터뜨리고 우아한 자태로 꽃잎을 열고, 다른 하나엔 곳곳에 산수유만한 크기의 하얀 꽃망울을 가득 부풀리고 있었다. 이건 막 피기 직전의 순간이다. 탑층이라 그런지 베란다에 볕이 너무 잘 들어 꽃 피기엔 최적인가보다. 주인이 없어도 너희 몫을 잘 하고 있었구나 싶어 더 예뻐 보인다. 이럴것 같아 물을 흠뻑 주었는데 잘했다 내게도 착한 말을 건넨다.
낮. 굿 애프터눈
아이는 내 가슴팍에서 오르락내리락, 내 품에서 부비부비 딩굴거리다 늦은 낮잠을 자곤 했는데 오늘부터는 친구들과 누워 선생님 품에서 엄마 냄새를 기대하다 잠이 들겠지. 첫 날인데 잘 잘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앞선다.
실은, 이불 빨고 마를때 까지 시일이 걸리니 그 새 이불 개시하기 전까진 엄마가 낮잠 재우면 안되냐고 남편이 먼저 걱정했다. 말인 즉, 엄마 품에서 더 재우는게 낫지 않냐, 왜 그리 떨어지게 하는 게 하느냐, 빨리 그러고 싶느냐는 거다. 난 이왕 적응 다한 김에 낮잠까지 자면 좋겠다 싶은건데...
엄마가 믿어주는 만큼 그마음을 읽고 성장한다는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잘 할거야, 처음은 좀 낯설어도 다 지나가는 과정일거다 마음 추스리고 서둘러 병원갈 채비를 한다.
동네 안과엔 첨이다. 대기자가 꽤 많다. 아슬아슬 점심시간이 걸릴까봐 서두른건데 오전 진료는 끝났다 한다. 별 수 없이 오후 진료 접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니 2등이다. 다음은 뭘 하지?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계획대로 카페로 향한다.
바닐라 탐앤치노.
얼마만의 나홀로 카페인지. 혼자지만 당당하게 넒은 소파 자리를 차지했다. 가방에 챙겨온 책과 패드, 노트를 꺼내놓고 폰 카메라 셀프 모드로 심심하게 얼굴을 쳐다보다 또 눈을 들여다본다. 눈을 평소처럼 그냥 뜨고 있으면 실핏줄은 잘 보이지않는다. 옆으로 살짝 30도 아래 즈음을 내려다보니 눈 속 새빨간 작은 뭉게구름이 보인다. 아이의 예쁜 이불을 얻은 대신 내 몸엔, 아니 내 눈엔 빨간 전리품이 새겨졌구나.
병원. 초진이라 시력검사부터 한다.
기계에 턱과 이마를 대고 초록불이 깜빡거리는걸보고있자니 신호도 없이 바람이 훅들어온다.아, 의사가 바람이 나올테니 눈을 감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내 이름이 불려지고 의사 앞 의자에 앉으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턱과 이마를 대고 기계속에 내 눈을 담는다. 찰칵! 분명 소리는 없었는데 한 줌의 커다란 불빛이 눈 속으로 번쩍한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주위는 깜깜하고 불빛의 잔상이 아른아른거린다.
순간, 보이지 않아요!라고 의사에게 말을 걸 뻔 했다. 그저 실핏줄이 좀 터졌을 뿐, 자연스레 생길수도 있고 피곤하면 그럴수있다 한다. 염증도 가려움도 없으니 자연히 두면 열흘 정도 지나면 없어질거라고. 안약은 필요없나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하나 처방해 드리죠. 건조하거나 눈이 좀 뻑뻑하다 싶음 하루 여섯번쯤 넣으세요.
아침에 눈에 실핏줄 맺혔다 하니 남편은 그냥 두면 나을거라 했다. 안약 필요할거 같음 약국에 가라 했다. 나는 그래도 병원에 가봐야지 했는데 의사 말이 남편이랑 같다.
몸이 내게 말을 걸면 읽어줘야 한다.
어릴적엔 그냥 무시하고 밤새고 일하고 놀고 일하고 했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큰 일을 한번씩 당하면 그 신호를 그냥 넘길수가 없다.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아니 좀 우습게 생각했던 젊은(?)날이 있었던게 참 우스워진다.
그런데 의사 앞에서는 왜 그렇게 한없이 작아지고 여려지는거야 대체. 나 아파요-, 여기가 이렇게 저렇게... 상세히 설명하는 것 또한 조금 쑥쓰럽다. 아니 생각보다 많이.
아...... 4시 15분 전이다.
이렇게 오후가 간다.
굿애프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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