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새]
요시모토 바나나, 김난주 옮김, 민음사(2003)
츠구미는 정말이지, 밉살스러운 여자 애였다.
(p.7, 도깨비 우편함 중에서)
아니다, 밤 때문이다.
그렇게 공기가 맑은 밤이면, 사람은 자기 속내를 얘기하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멀리서 빛나는 별에게 말을 걸듯. 내 머릿속 ‘여름밤’ 폴더에는 이런 밤에 대한 파일이 몇 개나 저장돼 있다. 어렸을 적, 셋이서 하염없이 걸었던 밤과 비슷한 자리에, 오늘 밤 역시 저장될 것이다.
(p.84 , 밤 중에서)
“마리아, 먼저 간다!”
라고 외치고는 철썩이는 파도 속으로 달려갔다. 팔꿈치에서 손 모양까지, 나와 너무 닮은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역시 저 사람은 틀림없는 나의 아버지라고, 선 크림을 바르면서 생각했다.
태양은 쨍쨍 높고, 해변에 있는 모든 것들 위로 새하얗게 쏟아졌다. 앗 차가워 앗 차가워 하고 어린애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아버지는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로, 점점 멀어져갔다. 먼 바다로 향하는 그는, 마치 바다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끝없이 넓은 파랑, 사람 하나쯤은 금방 삼켜버리고 만다. 나도 일어나, 뒤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펄쩍 튀어오를 정도로 차갑던 물이 포근하게 피부에 스미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올려다보이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다를 에워싼 산들이 빛나는 녹음을 뽐내고 있었다. 해변의 초록이 유독 짙고, 선명하게 보였다.
(p.115)
저녁 빛이 가득한 버스 정거장에 오렌지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버스는 천천히 정거장으로 들어왔다가 아버지를 태우고는 다시 천천히 도로로 나갔다. 아버지는 한없이 손을 흔들었다.
혼자서, 황혼 속을 걸으며 야마모토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조금 쓸쓸했다. 이 여름의 끝이면 잃게 될, 고향의 길을 오가는 이 나른함을 마음에 꼭꼭 담아두고 싶었다. 마치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 하늘처럼 온갖 종류의 이별로 가득한 이 세상을, 하나도 잊고 싶지 않았다.
(p.124-125, 아버지와 헤엄치다 중에서)
수박은 물기가 좀 많았지만 아주 엷은 단맛이 났다. 어둠 속에 앉아서, 열심히 먹었다. 손을 씻는 수돗물은 시원하고, 어두운 땅에 조그만 개울을 만들며 흘러갔다. 겐고로는 처음에 수박을 먹는 우리들을 부러운 듯 쳐다보다가, 마침내는 그 조그만 몸을 풀밭에 누이고 눈을 감아버렸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해 간다. 그런 사실을 다양한 형태로, 거듭 확인하면서 나아간다. 그래도 정지시켜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같은 밤이었다. 온 사방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조그맣고 고요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었다.
(p.141 축제 중에서)
나는 웃었다. 그리고 구멍 얘기를 했다. 요코 언니가 눈물을 흘리며 했던 얘기를.
쿄이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파도 소리와 겹쳐 어둠과, 몰아치는 바람과, 볼을 때리는 차가운 물방울 속에 또렷하게, 츠구미의 그림자를 부각시켰다. 마치 여기저기 바다를 장식하는 배의 불빛처럼, 츠구미의 행동을 말로 얘기하면 할수록, 츠구미의 생명의 빛이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듯 강렬하게 얘기 곳곳에서 빛나기 시작한다.
(p. 179-180)
츠구미가 나를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몇 천 번, 몇 만 번을 들여다본, 이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동자, 거기에는 거짓이 없다. 언제고 변하지 않고, 영원을 담고 있는 듯 반짝이는 눈빛.
(p.185, 그림자 중에서)
“그 아무것도 없음. 언제나 바다가 있고, 산책과, 수영과, 해 질 녘이 되풀이될 뿐인 나날의 느낌을 어딘가에 반듯하게 정리해 놓고 싶어 이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저나 우리 가족이 기억을 잃는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면 그때를 그리워할 수 있겠죠. 그리고 츠구미는 바로 저입니다. 그 고약한 성격, 저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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