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두 알이 숨쉬고 있다.
어스름때의 번화가에서 사들고 온 이 과일은, 밤이 깊어서야 더욱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낸다. 꽃향기와는 달리, 어딘지 알찬 부피를 느끼게 하는 매끄러움. 그리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대로, 여인의 지성과 같은 것을 일깨워 주는 숨결이다. 단지 레몬 두 알만의 향기로 가득히 채워지는 이 작은 방안의 의미를 헤아리다 품에 스미는 가을을 절감한다.
레몬은 운향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의 열매다. 희고 가슴이 메이도록 향그러운 오판화에 맺히는 이 실과는, 두꺼운 껍질안에 차라리 향기만을 성숙시킨다. 같은 과의 과일인 귤이나 오렌지에 비겨 보아도, 그 과육은 도무지 빈약할뿐더러 산미가 많아 그대로는 식용하기 어렵다.
살이라곤 말뿐, 떫고 질기기만 한 모과도 향기는 탐스럽다. 그러나 달고 우아한 모과의 암향에다 대면, 레몬의 숨결은 산뜻하며 보다 감각적이다.
레몬은 그 모양과 빛깔에 있어서도 얄미웁도록 세련된 열매다. 싱겁게 둥글기만 한 과일들의 보편성을 깨뜨린, 그저 ‘레몬형’이랄 수 밖에 없는 깜찍한 매무시. 어디에 놓아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언제나 그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는 순색의 노랑. 흑갈색 가구에 곁들여 품위있고, 포도주빛 커트 글라스에 담아 매혹적이요, 새하얀 식탁보 위에서는 더 없이 청순하다. 바깥 풍경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루비빛 사과가 산적된 과일 가게에서나, 파슬리, 샐러리 등 향신 채소가 쌓인 야채전에서나 레몬의 황색은 두드러져 눈을 끈다. 노랑은 ‘애정’의 색이라고도 하고, ‘예지’를 나타내는 빛깔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애정이란 욕구의 한 표현이요, 예지는 욕구의 한 결과이고 보면, 노랑색은 결국 ‘욕구를 대변하는 빛’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소력을 지닌 이 욕구의 색상. 레몬이 모든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기름진 삼치에 빵가루를 씌워 튀겨서 레몬즙을 뿌린다. 스스로의 향기를 주장하면서도, 감치는 생선맛의 튀김요리가 지닌 농후한 구미를 돋우어주는 그 몇방울. 협동에의 몸가짐, 그러면서도 의연히 지키는 개성의 영역... 레몬의 생리는 배우고 싶은 양식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레몬을 통째로 얇게 썬다. 예리한 칼 끝에, 섬세한 기하문양이 피어나면 하얀 미닫이가로 물씬 향기가 확산한다. ‘문양’을 온통 설탕으로 묻어버린다. 깊은 가을밤과 함께 마시는 몇 잔의 뜨거운 레몬차를 위하여, 이 으스러지기 쉬운 ‘향기의 무늬’를 항아리에 고이 사로잡아 두려는 것이다.
굵은 밀화단추, 호흡하는 보석. ‘레몬’의 피부는 차다.
'레몬이 있는 방 안' _ 이 영희
글을 읽고 나니 입 안 가득 레몬차의 풍미가 퍼진다.
이 짧은 글 한편으로 감각이 깨어나고 마음 속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뭐라 설명하기엔 아주 작은 감정같은데 한동안 상쾌한 기분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냉장고 안에 엄마의 유자차를 넣어둔 게 생각났다.
얼마 전 엄마가 손수 만들어 아빠 차 편으로 보내주셨지.
작년 것도 아직 남아있는데...
올해의 새 유자차 개봉하려면 어여 분발해야겠다.
아마 당분간은 꽃보다 커피보다 유자차 주간으로 임해야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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