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전 친정 집에는 달콤 새큰한 향기가 진동을 했다.
엄마의 고향 전남 고흥에서 한 지인이 보내주신 유자 한 상자 때문이다. 집에 유자가 도착한 것을 보면 때는 12월을 앞둔 가을의 끝, 겨울의 시작이다.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아도 김장 시즌과 맞물려 유자차를 재워두는 월동 준비를 할 때가 왔다는 걸 말한다. 분명히 휴일이지만, 몸의 게으름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허락할 수 없는 엄마는 싱크대를 박박 닦아 반짝반짝 윤을 내고 나서 청량한 물을 가득히 담는다. 상자 안의 유자가 몽땅 차가운 물에 입수하기 전 의식인 게다.
고흥에서 우체국 택배 상자에 실린 채 서울까지 먼 거리를 한 순간에 이동한 유자들은 새초롬하니 엄마에게 온 몸을 맡기고 말간 노란 빛깔의 얼굴을 내민다. 티 하나 없이 완전히 매끈하고 완벽한 얼굴은 없다. 점점점 알알이 까만 주근깨를 한 낯빛에 대체로 둥그스름한 모양새지만 저마다 굴곡이 다르다. 보기보다 강한 가을빛 때문인 조금 일찍 낙하해 땅에서 구른 탓인지 어딘가 어수룩하면서도 자연스런 사람의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엄마는 바구니 두 개를 앞에 두고 유자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분리한다. 바구니 하나에는 유자 알맹이 속 씨앗들을 빼낸 뒤 하얀 속열매를 채우고, 다른 하나엔 껍질만 담는다. 꽤 많은 양을 한 번에 작업해야 하기에 통째로 썰어내면 속 알맹이가 미끄러져 칼질이 어려울 수 있기에. 아마도 이런 이유로 엄마는 이 번거로운 일을 두 번이나 하는 것이다. 송송송 칼질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넓직하고 커다란 통 하나가득 얇게 썰린 유자의 속살과 껍질이 채워지고, 통 옆엔 그 여린 속살들을 입혀 줄 순백의 설탕 한 포대자루가 대기하고 있다. 흑기사 아니 착하고 정의롭고 달콤한 백기사를 자청하듯. 이제 유자차로 버무려지는 순간. 아이가 "할머니 아까부터 뭐하시는 거예요?"물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설탕에 재워진 유자 속살 몇가닥을 건네니 "아이 새콤다콤해, 하나 더 주세요"
엄마는 흔하디 흔한 꿀통 크기로 유자차 열댓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그 중 하나는 큰 딸과 손주아이 감기 없이 겨울 나라고, 또 하나는 가까이 사는 고모댁으로, 또 몇몇은 엄마가 아끼는 지인의 집으로 보내질 것이다. 잘 재워진 엄마의 유자청은 참나물 샐러드의 시크릿 레시피로 빛을 발하기도 한다. 나의 오미자 사랑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큰 엄마의 유자사랑 유자예찬론이 시작된 겨울. 더는 도망칠 수 없는 한 해의 끝 12월이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20131202.
십이월의 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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