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그림 과외를 받으러 가는 날.
호기심 반 관심 반으로 저지른 게 시작이었는데,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호기심과 관심의 영역은 줄어들고 두려움과 불안함이 커져가고 있었다.
사실 ...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고이 접어놓지 않고, 결정하고 최종 선택하기까지 다 나의 뜻이었거늘... 방금까지만해도 '과외 받으러 간다' 라고 누군가에게 배우러 간다고 자연스레 내 스스로를 낮추는 내 자신이 보인다. 이미 '기'가 한 풀 꺾였단 이야기다. 그러니 그 뒤따라 오는 생각의 길도 힘이 없다. 전공이 아니네, 해 본 적이 없네 (이건 사실 맞다) 그림보다는 글을 더 즐겨 쓰고 좋아했으니 어떤 기준에서건 못하는 건 당연지사인데, 그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 '정말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자체를 내 몸은 내 맘은 거스르고 있는 거다. 그러니 4절지 스케치북이 점점 두려워지는 건 극히 이상한 일이 아닌 거다.
불안한 기운은 역시나 승자였다.
첫 설렘과 시작이라는 즐거움은 잠시, 약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각기 다른 얼굴 형태의 동그라미, 때론 네모진 혹은 세모진 모양을 채워놓고 사람의 형상을 상상하며 연필을 움직이는 순간, 즐거움은 완벽히 두려움으로, 점점 공포로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러스트 강사가 내 주변을 서성이며 나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면 난 그대로 얼음이다. 붉은 레이다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버린다.
수업이 30분 남은 지점에서 결국 연필을 놓고서 난 관객석에 앉아버렸다. 마음이 그러기를 선언했다. 마음이 그러니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소개 타임에 솔직한 심정을 훌훌 털어놓는다.
-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도전한건데,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닌가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이 제법 가볍다. 그리고나서 차가운 물 한잔 들이키니 정확히 관객석에 앉아 편하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가 있다. 내게 돌아오는 답이나 의견 같은 것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 지금 그러합니다' 라고 인정하고 털어놓았을 뿐.
집으로 오는 길, 함께 동석한 지인과 커피 타임 가지러 동네 작은 카페로 향했다. 난 여전히 패자로서 환불을 염두하고 KO패 당한 심정을 반복해 토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그러하다며 으쌰으쌰 기운을 북돋아준다. 감사한데, 난 여전히 자신이 없다. 말 그대로 그림 앞에서 내 자신이 없다. 스르르 없어지는 나를 본다.
타인에게 나의 비루한 그림이, 실력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림'짓'이 상대적인 비교치가 될 수는 있겠으나 나의 적은 나인 걸 너무 잘 안다. 비교하기 너무 싫지만 비교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 감정 자체가 너무 거북스러운 것임을. 강사가 나의 처절한 그림'짓'을 보는 건 선생으로서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난 그것 자체를 나의 시선과 해석을 입혀 들으니 좋게 들릴리가 있나.
처음부터 내가 열었던 마음길, 내가 닫는다. 아직 어떤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뭐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신기한 건, 못난이 그림'짓'이지만 연필을 들고 있는 순간은 마음의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적당한 집중과 몰입으로 귀가 멍해진다는 것이다. 마음길을 더럽히고 다시 닦아내는 악마와 천사가 재잘대는대도 그 또한 그저 받아들이며 연필을 붙잡는 '짓' 도중 맑고 고요한 시간이 채워진다.
집으로 돌아와 못난이 첫 그림'짓'을 차마 버릴 수 없어 다시 만져주고 4절 한 면을 두 개의 프레임으로 나눠 보고 베껴 그려보는 연습을 했다. 약 40분의 시간이 흐른 뒤, 조금도 나아진 건 없지만 마음길이 아주 조금, 티도 잘 안 날만큼 쬐끔 밝아진걸까. 아까보단 맘이 편안하다. 그건 사실인데, 앞으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하는 걸까.
2013.12.03
십이월 셋째날, 낯선 것에의 도전.
못난이 그림짓과 마주한 첫 날. '
p.s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나의 못난이 그림'짓' 01. & 02.
01.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못난이들
02. 따라그린 못난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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