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 log

텅 빈 하루

greensian 2018. 12. 19. 00:07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정작 내가 해야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한 글자도 못 읽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날. 아내도 엄마도 아닌 온전히 '내'가 되어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단 의미다.

어제밤 [경애의 마음]을 읽다가 그대로 거실에서 잠이 들고 말았고 일어나니 아침 7시 반.

# 아내이고 엄마

서둘러 남편 아침 요깃거리로 토스트를 싸서 보내고, 두 아이 아침 먹이고 등교, 등원을 마치고 나니 너저분한 옷가지와 장난감이 뒤엉켜 널부러진 거실이 헛헛하다 못해 공허하다. 하염없이 게으름을 뚝뚝 흘린 채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너무도 얄밉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
누군가 대신 치워주지도, 치워줄 수도 없는...치워봤자 몇 시간 후면 궁극의 널부러짐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차마 이렇게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나의 하루를 시작하는 건 참을 수가 없으니까 곧장 청소기를 끌고 나온다. 아내, 엄마 그리고 나의 자아가 충돌하는 지점, 난 나의 정신적 승리를 위해 진정한 내 하루가 시작되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번엔 딸

청소기를 돌리기 전 컴퓨터를 먼저 켜 두고 커피 포트 물 끓이기도 잊지 않는다. 오늘 내일 이틀간은 부모님 부탁으로 인터넷 작업을 해야해서다. 최대한 빨리 구석구석 틈 사이의 먼지를 한방에 제압하고 그 다음엔 커피.

믹스커피 탈탈 털어 이 역시 한방에 꿀꺽 할 수도 있지만 무심하게 그럴 순 없지. 아니야 그러지 않을테야. 칼리타 그라인더를 꺼내 도서관 앞 카페에서 직접 볶은 과테말라산 원두를 넣고 갈기 시작한다. 드르륵. 드르륵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휘 휘- 돌아가며 원두 갈리는 소리가 제법 청량하다. 오늘 아침내 귀에 들어온 소리 중 제일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다가 깊은 갈빛 향까지 내어 주니,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싶다.

오늘의 아침이 왜 이렇게 부산한가 했더니, 온전히 나의 시간에 새치기 하듯 끼어든 일들 몇 가지로 인해 주어진 시간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되도록 빨리 일을 마치고 싶은데 계산된 분 초에 딱딱 맞춰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보니 생기는 걱정 아닌 걱정때문인지도. 커피를 내리는 단 몇 분동안 널부러졌던 뇌와 마음가짐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드립 커피를 잔에 담아 와 컴퓨터 앞에 마주 앉는다. 이제 드디어 시작.

부모님 부탁은 딸로서 해드리는 일인데, 일을 처리하려면 미리 공부하고 알아둬야할 것들이 있을지 모르니 되도록 꼼꼼히 내용을 살핀다. 환갑을 훌쩍 넘긴 부모님에게 인터넷 업무는 너무 어렵고 생소한 일이다. 주민센터에서 컴퓨터를 배우며 이메일 보내는 법도 알게 되었지만 공인인증서니 뭐니 일련의 절차와 과정은 꽤나 익숙한 나 조차 인내하고 기다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아주 잠시, 나

몇가지를 살피고, 부모님과도 확인 전화를 마치고 그제사 틈을 타 머리를 감는다. 아침을 늦게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제사 꾀죄죄 초췌한 몰골이 거울에 드러난다. ㅠㅠ 흰 거품을 내 박박박박 머리를 감고 시간을 아끼려 선풍기에 두피를 말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 휴.... 이제야 좀 개운한 느낌. 상쾌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

#다시, 엄마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어린이집에서 행사가 유난히 많다. 생일 맞은 친구에게 줄 선물도 골라야 하고, 산타행사(?)를 위해 아이 선물도 미리 챙겨놔야 한다. 심지어 금요일엔 케이크 만드는 행사까지 있어 원에 직접 가야 하고, 행사가 끝나면 바로 픽업해서 집으로 오는 일정이다. 크리스마스니까 ...

크리스마스니까, 무미 건조하게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큰 아이 학교 절친들에게 나눠줄 작은 선물도 골라볼까. 올해 는 내복 안 사고 웬만하면 버티려 했는데, 하나는 무릎팍에 구멍이 났는데도 자기가 좋아하는 옷감이라며 절대 버리지 못하게 하는 데다가, 바지 안에 내복을 받혀 입는데 짧아진 내복이 발목 위로 자꾸 올라가길래 굳이 잡아 늘여뜨려 양말을 끌어 올리니 양말 때문에 엄지 발가락이 아프단다. 등교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 양말로 내복 끝을 잡아주지 않으면 바지를 입을 때 스륵 위로 말려 올라가니 이것만큼 귀찮고 싫은 게 없다. 자꾸 자꾸 바짓단 위로 도망가는 내복. 돌려 생각하면 그만큼 아이가 컸다는 증거. 다리도 길어지고 발도 커졌다는 것. 내복이랑 양말 쇼핑도 더는 미루면 안되겠다. 옛다 쇼핑 리스트 추가요.

내복에 양말, 생일 선물에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이 점점 주렁주렁. 통이 점점 커진다 이거. 그렇다보니 단 돈 천원, 몇 백원도 이왕이면 아끼려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일단 다 넣다가 나중에 봐야지 했는데. 어라? 얼떨결에 붙은 배송료는 무엇?! 물건이 맞는지 확인하고, 종류도 디자인도 사이즈도 각각 다르니 내 취향에 맞는 걸로 다시 보고, 보고 또 보고....
시간을 아끼자고 외출을 안하려 했던 건데, 인터넷 쇼핑은 달리는 시간을 자꾸 붙잡는다. 이게 맞냐고, 더 좋고 싼 건 없냐고, 질도 좋은지 후기는 살폈냐고, 사이즈
호수 확인했냐고, 그 사이 물건 하나가 품절됐다. 그 얘긴 즉, 해당 물건을 대체 할 새 물건을 다시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

# 하교시간, 여전히 엄마

벌써 한 시 오십분. ㅠㅠ 부모님 부탁 외엔 결국 이렇다 한 게 없다.
태권도 피아노 가기 전까지 아이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드디어 인터넷 쇼핑 주문을 마치고 나니 이젠 둘째 픽업시간이 닥쳤다. ㅠ

# 등원시간, 여전히 엄마

큰 애 학원을 보내고, 둘째와 같이 동네 소아과를 간다. 영유아 검진 문진표를 일찍이 받아왔어야 했는데 이제사 일을 본다. 집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라 가는 내내 아이의 종알 종알 끝없는 질문에 영혼이 너덜너덜. 마스크를 하지 않겠다고 사투를 벌이는 녀석 앞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힘도 없다. 소아과에서 나와 간단히 장을 보고, 녀석을 달래 줄 빵집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그 가까운 거리를 녀석의 페이버릿 마을 버스에 탑승하여 집 앞에 내린다. 어느덧 노을이 져 핑크핑크한 하늘...

# 저녁시간, 아직도 엄마

오늘은 너로 정했다.
닭감자조림을 메인으로 꽁치김치찌개와 메추리알 간장조림과 데친 브로콜리, 그리고 시금치 나물.

학원 마칠 시간에 큰 녀석을 픽업해 와 퇴근이 늦는
아빠를 제외하고 셋이서 나름 도란 도란 저녁을 먹는다.
운동 후 먹는 밥이라 그런가 아이도 닭고기와 감자, 국물에 밥을 비벼 한그릇을 뚝딱 하고, 둘째는 메추리알에 꽂혀 정신없이 흡입하고. 점심도 거른 채 종종거렸던 하루를 보낸 나 또한 웬일인지 밥맛이 꿀맛이다. 꽁치김치찌개 성공했네.

직장이 멀어 퇴근이 늦는 남편이 귀가했다. 저녁을 먹지
못한 채로. 이젠 아내로 복귀.


평소같으면 한번 쯤 폭발했지 싶은데, 오늘은 저녁이
맛나서 그랬는지 전반적으로 뾰족하진 않았다.
다만. 다만. 다만!!!
도대체 나의 시간은 어디로 갔나...
정신없이 내달렸지만, 결국은 텅 빈 하루가 못내 아쉽고 속상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차고 넘칠만큼 가득 가득 쏟아부어버렸다.

이런 걸. #긴글주의# 라고 하는군!!!


2018.12.18
애썼다.
텅빈 하루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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