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빨강 표지에 이끌려 잠시 데려온 책. 끊어읽기하려다 가속도가 붙어 한 숨에 한달음에 보았다. 삶은 무수히 많은 우연과 우연의 점들이 닿아 머무르다가 또 지나가는 장면들의 집합.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인물의 일상에 균열을 낸 단 한 방울의 우연, 아니 방울방울 이어지는 뜻밖의 일들로 삶은 또 다르게 굴러간다.
거듭되는 우연 속에서도 우연한 선택을 통해 접하는 우연한 만남과 우연히 느끼는 감정들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지만 다르게 전개되고 또 흘러간다. 루틴함에 갇힌 일상에서는 볼 수 없던 다름의 모습으로. 그래서 결말은? 글쎄. 아무도 모른다. 끝을 모르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헷갈리는 정교한 구조의 소설이다.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치밀한 팩트 체크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모호해지고, 때론 거짓이 더 진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과 진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삶 안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끝을 알 수 없기에 불안하게 흔들거리면서도 매일의 안온함을 지키려는 각자의 삶이 있다. 생은 불안과 안정 그 어디쯤엔가 머물렀다 지나가는 순간의 연속이다.
삶은 결말을 향해 편집하고 재구성되는 드라마가 아니기에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라는 물음은 현재 진행형에 있는 실제 삶에선 쓸모가 없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에피소드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계획은 계획이고, 플랜 비를 세운다 한들 그게 정답이 아닐수도 있고, 결말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을 붙들고 그저 한발 한발 나아가는 수 밖에.
소설 속에서 볼드체로 표시된 단어들 - 한 명도. 받아들이게. 아무나. 될 수 있는 한. 받아들였다. 정말로. 모르는. 자연스럽게. - 을 삶에서 꽤 자주 마주친다. 자기 훈련의 산물이든 느낌적 느낌, 의식의 반응이든간에. 우연인가 운명인가. 아님 우연을 가장한 필연?
단 한 방울. 순간 떨어진 단 한 방울로 넘치거나 혹은 모자라는 병 속의 물 처럼. 운명을 가르는 꽤나 강력한 우연의 기운들. 우린 매번 우연의 신을 마주치고 보내고 스치고 지나가고 또 마주친다.
* 책 속에서 *
| 그는 자신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이 직접 듣는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순식간에 낯선 어떤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그리고 동시에 낯선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려는 시도였다.
그는 언제나 리-프레시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병 속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 병을 비워버리는 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텅 비어 있는 병 속에 무언가가 점점 차오르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병 속이 비워져 있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언제나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병 속의 물이 언제나 균형을 맞출 수 있느냐는 거였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러니까, 그건 단 한 방울과 관련된 문제였다. 단 한 방울 때문에 너무 많은 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 |
_ 손보미 <우연의 신> p. 155-156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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