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작가의 역사 동화 <제암리를 아십니까>.
작가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어 표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소년과 소녀. 한복차림을 한 귀밑머리의 소녀 곁에 있는 닭 한마리. 뒷 표지에는 지난 역사를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름없는 풀뿌리 같은 백성들이 외친 만세 소리를 잘 들어보라는 추천사가 발췌되어 있다. 사건에 대해 잘 몰랐기에 부끄러웠고,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단숨에 읽어나갔다.
이 장편 동화는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이야기다. 1919년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된 3.1독립운동의 흐름속에서 제암리 발안 -지금의 화성 지역 - 장터에서 수원군 최대 규모의 연합 만세항쟁운동이일어났다. 일제는 3.1독립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주동자를 색출하고 항거 운동의 싹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불러들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던 것이다.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영국출신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의 글과 사진으로 기록되어 같은 해 5월 27일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 지에 실리면서 처음 알려졌다.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바쳤다고 생각하는 일본인 소년 나카무라의 무지함에 답답했고, 무자비한 탄압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일제를 상징하는 사사까의 악랄함에 분노했고, 일제치하를 정당한 부국의 수단으로 여기는 미국인 선교사의 생각에 가슴이 턱턱 막혔다. 한편, 엄마의 몸조리를 돕고 가족을 위해 산에서 나물을 캐며 담담히 맏이 역할을 해내는 연화를 볼 땐 내내 안쓰러웠다. 연화는 안 목사와 미국인 선교사의 다른 생각과 두 패로 갈라선 어른들을 지켜보며,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도 무서움을 감출 수 없다.
어린 아이라서 어른이 말해주지 않은 한 현실을 잘 모르는 나카무라, 어린 아이라서 현실을 알고 견디면서도 무섭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연화와 그저 배고픔에 떨던 어린 동생들.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아버지 쌍칼과 김만복을 부끄러워하는 용국과 순이. 어린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시대 상황과 다가올 앞날이 무겁기만 하다. 어린 눈에 비친 역사의 현실은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지만 양심만은 속일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이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역사의 주체임을 기대하게 한다.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너희 나라가 지은 죄를 낱낱이 세상에 알려. 이건 사사까 아들 나카무라가 아니라, 나에게 쑥을 캐 주던 동무에게 부탁하는 거야.”
(186페이지 중에서)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야기 말미에 연화가 나카무라에게 남긴 말이 마음에 남았다. 아직도 진실을 외면하고, 사과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일본과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기에.
그러다 두 번, 세 번 거듭해 책을 들여다보니 어린 아이와 어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카무라와 연화 둘 다 어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어린 아이들이기에, 나 역시 두 아이의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이 더욱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연화에게 남긴 말의 울림은 그 의미가 더 크다.
“연화야, 넌 이 땅의 주인이 되어라, 메마른 땅을 일구는 참주인.”
(91페이지 중에서)
열한 살 어린 연화의 가슴 밑바닥에 뜨거운 불기둥을 심어주고, 더 큰 어른의 마음을 품게 한 이 말은 나에게도 그 뜨거움이 진하게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책을 완전히 덮고 난 뒤에는 <제암리를 아십니까> 라는 작가의 물음이 <당신은 이 땅의 참주인, 참어른입니까>로 바뀌어서 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어떠한 어른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나간 역사는 그냥 덮어두고 혹은 역사적 지식의 하나로 생각하고 외면하고 온 건 아닌지. 미래의 가능성인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과연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물음이 계속 이어졌다.
할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내려와 마음 한가운데에 쌓였다는 연화의 독백에서 역사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바른 눈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듯 역사를 대하면, 아이들 역시 ‘앎’에 머무르는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고 나아가는 힘을 가질 수 있음으로 해석된다. 고학년을 위한 역사책을 찾는 부모라면 반드시 어른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하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책 속의 이야기와 지금의 역사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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