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 log

100년 전 그 날의 선언을 옮겨 적으며

greensian 2019. 3. 21. 17:48


봄이 채 오기도 전 어느 날, 지인의 독립선언문 필사 노트를 보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적이 있다. 이제껏 선언문을 끝까지 정독한 적이 있었던가. 자문하다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역사책에 담긴 사진으로만, 잊어서는 안 될 역사라고 머릿속으로 기억할 뿐. 글을 읽어볼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그 순간 느낀 부끄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난 바쁘면서도 평온한 일상 속으로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어 들어갔으니 말이다.

2019년 3월 1일, 큰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를 꺼내 흔들어대며 부산스럽게 아침을 열었다. 국경일에 태극기 달기를 제 일처럼 챙기는 아이인데 이번엔 유난히 더 즐거운 눈치랄까. 물어보니 태권도장에서 마련한 태극기 이벤트에 인증샷을 올리면 칭찬 보너스 점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형이 부러운 둘째가 형의 태극기를 달라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한바탕 형제의 난이 벌어졌고, 늘 그렇듯 수습은 언제나 엄마인 나의 몫. 난 아이들이 전에 그린 태극기 그림을 찾아와 긴 막대를 달아서 막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서둘러 태극기 게양 사진을 찍고 아이 친구의 생일파티가 있는 키즈카페로 향했다. 우리의 하루는 경건하게 역사를 돌아보는 것과는 거리가 먼 풍경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북적대는 아이들 틈에서 하루를 보내고 맞는 밤은 평소보다 더 적요했다. 역사를 보고 배울만한 현장에 갔어야 했나 아쉬움과 후회가 교차했다. 태권도장 커뮤니티에는 집집마다 다른 사진이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태극기를 휘날리기도 하고, 스케치북에 태극기를 그리기도 하고, 만세 삼창을 하는 동영상도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온 가족사진을 보니 나도 어릴 적 부모님과 서대문에 갔던 날이 스쳤다. 날씨는 화창하고 좋았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떨었던 날. 좁은 독방과 처참하기 그지없는 고문사진을 보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한동안 울적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순간 지인이 손 글씨로 옮겨 적었던 3.1운동 독립선언문이 떠올라 검색을 했다. 선언문에 담긴 글을 천천히 되새겨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한 번은 소리 내어 읽어보고, 잠자고 있던 노트를 꺼내와 옮겨 적기 시작했다. 나의 가족과 안온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음에 대한 마음의 빚을 깨닫는 게 먼저인 것 같아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일상의 끝에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쑥 들어오던 시간.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데 ‘뎅-’ 하고 마음 속에 장중한 징이 울렸다. 꽤나 길고 진하게. 깊고 더 깊게. 그 묵직함에 펜을 쥔 손과 팔 근육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평소처럼 글씨를 대충 흘려서 쓸 수가 없다. 평소보다 또박 또박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다. ‘ㄹ’자를 쓸 때도 각지게 반듯하게 쓰려고 집중한다. 한 시간이 좀 안되었을까. 끝마치고 나서야 뻣뻣해진 손을 서서히 풀어 움직인다. 손을 펴 보니 손톱자국 네 개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기미독립선언문 필사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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