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다. 끄적이는 메모용 얇은 노트는 있지만 일정을 전체적으로 확인하고 기록하고 관리하는 개념의 다이어리는 잊은지 오래된 것 같다. 일상에, 시간에, 상황에 쫓겨 폰을 켜고 메모장에 기록하고, 일정 기능을 활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빠르고 편리하니까.
그런 습관때문인지 언젠가부터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적을 때,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얕은 손떨림은 물론 글씨가 제대로(바르고 예쁘게) 써지지가 않는 것이다. 땀이 나고 맥박이 빨라지며 두근거리는 전조 증상이 나타나면서 원래의 익숙한 필체는 없어지고, 낯설고 이상한 흘림체를 마주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를테면 소아과 접수대에서도 고작 아이 이름 세 글자를 쓰는데도 손은 머뭇거리고, 동화수업 말미에 글쓰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도 종이와 펜을 쓰지 않고 폰 메모장에 쓴 건 나 혼자였다. 원하는 속도, 가지런한 글씨체로 술술 써내려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보지만 정작 내 손은 쓰기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 휴대폰 키보드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 심장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손은 점점 버퍼링, 굼뜬 현상이 반복되다보니 쓰고자 하는 의지에 이끌려 어정쩡하고 어색한 흘림체가 되고 마는 것.
악필 고치는 책으로 연습할까, 캘리그라피를 배워볼까 하다 말았다. 답은 간단했다. 쓰기 감각을 회복하려면 다시 써보는 수밖에. 디지털에 익숙한 손과 뇌와 마음을 잘 달래어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길은 결국 시간과 정성의 문제다. 필사의 경험이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마음 먼지가 쌓였을 때 그만한 처방전도 없다.
오늘 이화정 작가님과 인디언 달력모임을 통해 마주하고 들여다본 필사의 풍경. 쓰다보니 9월에 이름짓기 답을 찾은 것 같다. '천천히 머물되,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9월 인디언 달력모임, 필사의 풍경, 2019.9.3
뜻밖에 넌, 김원경
문장이 통째로 마음속에 훅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밟힌 구절은,
'무수히 많은 너와 내가' '무수한 나와 너'
드디어 책상 정리를 마쳤다. 다시만난 세계, 나의 공간.
다이어리 안쓰고 뭐하고 살았나 살짝 허무해하다가 낱권의 노트들을 꺼내보았다. 조각조각 흩어진 어떤 날들의 기록이 있었다. 잊고만 산 줄 알았는데, 모든게 정지했다 싶었는데, 그래도 끄적거려보는 날들의 기억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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