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Intern> (2015) 인트로를 통해서
‘나’를 다시 보다
주방에 들어서기 전, 마음을 리셋하는 의식 중 하나, 넷플릭스로 영화 <인턴>을 틀어놓는 일이다. 한참 전에 본 영화인데 최근 들어 무한 리플레이한 지 거의 두 달째. 주방일을 하며 서서 끝까지 보고 듣는 건 아니고, 요리나 설거지를 마칠 무렵까지 마치 조각 케이크 먹듯 영화를 한 조각씩 나누어 며칠에 걸쳐 반복해서 보고 있다.
*
Freud said,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
프로이트는 말했죠.
사랑과 일, 일과 사랑.
그게 전부라고.
*
영화는 도입부가 정말 진국이다. 센트럴파크(!)의 초록 초록한 나무 풍경으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고, 단체로 요가를 하는 사람들 사이로 벤(로버트 드 니로)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는 자기소개 동영상을 찍고 있는 것인데,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신생 기업의 고령 인턴 채용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
<Senior interns Wanted>
Applicants must be over 65 years of age,
have organizational skills,
a genuine interest in e-commerce.
that is and a roll-up-your sleeves attitude.
AboutTheFit.com
<고령 인턴 구인>
정리 정돈 능력이 뛰어나고
전자 상거래에 관심이 있으며
소매를 걷고 일할 마음의 준비가 된
65세 이상의 지원자 구함
*
Cover letters are so old-fashined.
Show us who you are
with a cover-letter video.
자기소개서는 구식이니
자기소개 동영상을 보내주세요.
입사를 위한 기본 서류는 자기소개서 아니던가. 이렇게 말을 꺼내고 보니 이미 내가 꼰대 같다. 브이로그, 유튜브, 인스타 라이브 방송이 실시간 진행되는 요즘의 일상에서 영상과 구독은 필수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영화이지만, 온라인 쇼핑몰 스타트업답게 구인 광고 속 호기롭고 당찬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옛날사람처럼 구식인 자기소개서 말고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세요! 하긴, 글은 얼마든지 허세를 부리고 과장할 순 있지만, 영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건 연기가 아닌 이상 인상착의와 말투 자체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과거에 쓴 자기소개서를 떠올려 보시라. 정말 가식과 포장 1도 없이 솔직하고 진실됐는지... 부끄러움은 오직 나의 몫일뿐...
벤은 마치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자기소개 동영상 찍기 미션을 수행한다. 아침 출근하듯 정장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빗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단추를 채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카메라 앞에 앉는 벤. 일흔 살 인생의 기나긴 페이지를 셀프 인터뷰 형태로 5-6분짜리 영상에 담아낸다.
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목표를 담아 진솔하게 구술한다. 이 장면을 보다가, 최근 관심 있던 강의 커리큘럼에서 동영상 시연 과제를 필히 제출해야 하는 것을 보고 결국엔 포기했던 일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아이들의 여름 방학,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시국, 계속되는 긴장 국면 속에서 온전히 집중할 만한 시간이 부족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러 핑계와 변명을 뒤엎을만한 자신감과 에너지, 열정도 사그라든 지 오래라서 확 저지를 생각도 못했다.
현실 속 나는 포기라는 카드를 선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 <인턴> 속 벤의 대사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와 닿는다. 열정과 냉정 사이 그 어디에도 가깝지 않지만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는 온기가 전해진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 켜켜이 쌓인 경험과 연륜, 차분함과 여유로움이 내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은퇴 후 남는 시간에 여행도 다니고, 골프, 독서, 요리, 요가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취미도 가져보고, 자식 손자를 만나러 가고 해 보지만, 결국 자신은 인생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그걸 채우고 싶다고 고백하며 자기소개 동영상을 이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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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the idea of having a place
I can go every day. I want the connection,
the excitement. I wanna be challenged,
and I guess I might even wanna be needed.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사람들과 연결되고, 즐겁잖아요. 도전적인 걸 해 보고 싶어요.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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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ch stuff might take a bit to figure out. I had to call my 9-year-old grandson just to find out what a USB connector was.. But I'll get there. Eager to learn.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죠. 9살 손자에게 전화해서 USB가 뭐냐고 물어야 했거든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 배우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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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I want you to know I've been a company man all my life. I'm loyal, I'm trustworthy, and I'm good in crisis.
그리고 내가 평생 직장인으로 살아왔다는 걸 알려주고 싶네요. 충성심 있고, 믿음직하고, 위기에도 대처를 잘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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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 love that you're right here in Brooklyn. I've lived here all my live, and lately I feel I may not be hip enough to live in Brooklyn, so this could help with that too.
회사가 브루클린에 위치해 있다는 것도 정말 좋아요평생 여기에서 살았지만 최근 들어 내가 브루클린에 살만큼 세련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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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인터뷰 형태로 담아낸 자기소개 동영상에는 여유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자신을 과하게 포장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화할 줄 아는 여유 말이다. 오직 진정성과 진솔함이 다 한 자기소개 동영상이라서 모범 답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솔직하고도 담백한 말투, 부족한 점 마저 소탈하게 드러내는 면도 인물이 가진 고유한 톤 앤 매너를 보여준다. 입사 담당자라면 65세 이상이라는 고령 인턴 채용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편안하면서도 안정감이 감도는 인상의 이 사람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도, 벤의 영상을 본 인사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 하나로 벤은 이미 대면 면접 1순위 자격을 얻은 것이다)
마지막에 벤이 덧붙인 한 마디.
I read once, musicians don't retire.
They stop when there's no more
music in them.
Well, I still have music in me,
absolutely positive about that.
뮤지션은 은퇴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더 이상 음악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한다고 하죠.
내 마음엔 아직 음악이 있어요.
확실히 그래요
끓어오르는 열정 운운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연륜이란 이런 것임을 묵직하게 여운을 남기는 한 방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차분히 그리고 꾸준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인생 여행을 이어나가는 그 담담한 태도가 부러울 정도다.
그러한 마음가짐 때문일까. 이 영화의 인트로를 볼 때마다, 벤의 고백체를 리플레이할 때마다 형체도 내용도 잘 알 수 없는 내면의 잔 열기가 뭉근하게 퍼지는 걸 느낀다. 그 옛날처럼 느낌 가는 대로 훅 저질러보는, 열정의 스파크가 ‘타닥!’ 하고 튀는 일은 거의 없고 내려놓기 일쑤지만. 한 순간에 사그라들지 않는 잔 불씨만큼은 아직 살아 있음을. 정갈하게 잘 가꾸고 다듬어 잔 불씨에 한 호흡 고이 모아 후후 불어주면 언제든 다시 화르르 붙어 오르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지.
최종 합격 전 마지막으로 가진 대면 인터뷰에서 자식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젊은 면접관이 벤에게 묻던 질문이 뇌리에 계속 남는다.
What do you see in yourself in 10 years?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어떨 것 같나요?
(10년 후면) “내 나이 여든 일 때요? “라고 답하니 청년 면접관은 그제야 벤의 나이를 확인하고는 무의미한 질문임을 파악하고 당황한다. 그러고는 질문이 어울리지 않으니 넘어가자고 한다. 자기소개서가 구식이라고했듯이 면접 자리에서 으레 관행적으로 해 오던 그 물음이야말로 벤에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구식 질문이었을 터.
내일과 미래가 있기보다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장례식에 가게 되는 벤의 나이. 그즈음이라면 주어지는 지금(!)이라는 시간보다 더 값진 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찍고, 마흔 해가 넘도록 들고 다닌 클래식한 서류 가방을 지니고, 쥴리가 창업한 온라인 의류 쇼핑몰에 시니어 인턴으로서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적 장치라고 말이다) 그가 브루클린에서 40년을 몸담았던 전화번호부 출판사가 허물어지고 새로 들어선 건물이 바로 창업자 쥴리의 회사였으니.
Experience never gets old.
경험은 결코 나이 들지 않아.
현실과 시공을 초월하고픈 깊은 열망 때문에, 배경이 뉴욕이라서,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등등 아주 단순한 이유로 이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한 꺼풀 더 벗겨보면 이렇다.
집안 다른 공간도 아닌 하필 주방에 들어설 때마다 내게 마인드 리셋이 필요한 건, 실은 엄마 나이 열 살이 되었음에도 ‘주부’라는 역할과 직업이 아직도 낯선 불량 주부라서다. 내 것이 아닌 옷을 입은 듯 어색함은 여전하고 잘 해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거니와 절대 강자이자 넘사벽인 우리 엄마 기준엔 턱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각성할 만한 장치를 켜 두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건 더 잘해보겠다는 주부 마인드(?)가 아니라 어떻게든 아직 찾지 못한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감의 끈을 잡아보고자 하는 일종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해 두는 게 낫겠다. 더 솔직하게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가 부러워서일지도. 실제 그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어야 했던 서른 하나 전후의 나의 선택이 자꾸 아른거려서다.
오늘도 난 주방과 가장 가까운 곳인 식탁 위 제멋대로 쌓인 아이들의 책, 그림 낙서들, 레고 장난감을 뒤로하고 잔뜩 늘어진 읽다 만 책들과 커서만 깜빡이는 노트북 하얀 백색 화면 앞에서 서성거리다 아무것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바쁜 와중에 틈나는 대로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서 조각조각 남겨둔 두서없는 짧은 메모를 끄집어 모아 보는 지금의 나.
의무적인 일상 속 살림을 돌보고 끼니 차림을 목적으로 하는 일터(?)에서는 그 어딜 찾아봐도 나의 이름은 없고 엄마와 아내라는 꼬리표뿐이니까. 물론 나의 손을 거쳐 아이들은 모르는 새에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음이 감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난 매일같이 텅 빈 구멍을 동시에 마주한다. 은퇴 후 벤이 아무리 밖에 나가서 바쁘게 움직이고 활동을 해도 느꼈다는 ‘마음의 빈 구석’처럼 말이다.
그 빈 구석을 채우려고 오늘도 잠든 아이들 틈에 누워 휴대전화 메모장에 끄적거림을 완성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심상치 않은 코로나 확산세로 불안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깊은 밤을 통과하고 또 새로운 하루가 열렸다. 하루 뒤, 일 년 뒤를 생각하는 일이 무색하리만큼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파도타기 하듯 무자비하게 밀려온다. 그 와중에 10년 뒤 내 모습을 상상하자니 다소 막막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건드리는 작은 영감들이 있는 한 느린 거북이걸음이라도, 때론 그 느림이 한없이 달팽이 걸음이어도 서투른 글로나마 뚜벅뚜벅 나의 길을 가고 있으면 좋겠다.
*대본은 스크립트를 참조하였습니다.
*브런치 2020.8.18 발행 글입니다.
https://brunch.co.kr/@hyejung/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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