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듯, 일기쓰기 과제가 꼭 있었다. 사실 말이 일기쓰기이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글로 표현된 사유 자체를 지위와 권력을 가진 이에게 제출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리라. 하지만 굳이 이렇게 심각하게 해석하지 않아도 일기는 글쓰기라는 작은 생활의 습관을 만들어주는 연습이자 하나의 도구일게다. 개인 취향의 정도차이는 분명 있겠으나 남 앞에서 말로 표현하기를 실로 두려워했던 나로서는 꽤 효과적으로 먹혔던 장치인 것 만은 확실했다. "일기가 좋았어요" 라기 보다는 "쓰는 일이 그리 나쁘진 않았어요" 이 정도의 늬앙스.
그러나 일기쓰기 방학 과제는 "나쁘진 않지만 밀린 일기는 쥐약이었어요"라고 말하겠다. 방학 시작과 함께 첫 며칠은 학교에서 해방되어 맘껏 놀아도 되는 자유와 행복이 넘치고 넘쳐 일기도 재미있게 써 볼까 잠시 척 했다. 그러다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일기장과 나와의 거리는 공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만큼 멀어진다. 한 달 동안 팽팽 놀다가 개학 1주일 즈음 앞두고 탐구생활과 만들기 숙제, 그리고 일기쓰기를 하지 않은 죄로 불안감에 심장이 쫄깃해진다. 사실 1주일이면 그 모든 걸 최고로 잘하진 못할 지언정 가장 보통으로, 적당히 정성을 버물여 왠만큼은 해 낼 수 있는 시간이긴 하다. 문제는 그 1주일 조차도 어영부영 써버리는 통에 방학 과제는 별안간 벼락치기로 전락한다. 그 피나는 작업은 개학날 자정 넘어까지 이어지다 눈꺼풀 짓누르는 졸음에 못 이겨 대충 수준으로 마무리짓는 것이다.
방학 날 받은 탐구생활 책은 손 때 묻은 자욱 하나 없이 새하얗기만 하고 새 책냄새가 그윽히 베인 지면 속, 그 수많은 탐구형 질문들에 어찌 대답을 해야하는지 골치가 아파온다. 만들기 숙제도 마찬가지. 문구점에서 돈을 주고 사는 재료보다는 우유팩, 요구르트병, 신문지 등 각종 생활형 아이템들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막상 찾으려고 할 때 없다는 크나큰 난관에 부딪힌다. 보통날 가장 보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의 미친 존재감이란 이럴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불안감은 일기쓰기 과제에서 피크를 달린다. 이유는 그 날 그 날의 이야기는 없던 일을 한 것 처럼, 했던 일을 안한 것 처럼 꾸며쓸 수 있으나 날씨 기록은 그렇지 않다. 날씨야말로 만인이 공유하는 지구별의 유일무이한 진실이니 이건 허위 작성이 불가하다. 물론 모두가 몇월 며칠 그날의 날씨를 기억하는 컴퓨터 인간은 못 되지만 그 당시 신문을 펼치면 증거가 나오므로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빠가 매일 아침 본 신문지를 버리지 않고 쌓아두었기에 그 자료들은 내 일기장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날씨 따위 그냥 대충 가장 심플한 5지 선다 - 맑음 흐림 비옴 구름 눈 - 안에서 돌려막기 해도 되는건데, 그 때의 나는 참 순진한 초등학생이었구나. 날씨를 가짜로 썼다고 담임 선생님이 그걸 뒷조사하지도, 나를 혼내지도 않았을텐데 난 참 미련하고 소심했구나. 정말 많이 여렸구나... 그러니 평소에 잘하라는 어른들 말씀이, 매일매일 조금씩 규칙적으로 하라는 교과서님 말씀이 괜히 말씀이 아닌거다. 후회는 늦었고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있으며 결과물은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스피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쓸 때 전략은 이렇다. 일기 공책 첫장을 편다. 일기장은 약 1.3~1.5 mm 간격으로 줄이 쳐있는데, 제일 첫줄에 날짜 요일 날씨를 쓰고 두번째 줄에 제목 : (땡땡)을 써둔다. 물론 날씨와 제목은 빈칸으로 둔다. 당장 어제 날씨 빼고는 해당 날짜에 날씨도 모르겠고, 글의 소재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다음 장 첫줄과 두번째 줄을 채운다. 사실 일기를 꼭 매일매일 써야하는 건 아니므로 2~3일 간격으로 일정을 띄엄띄엄 조정하면서 날짜를 먼저 써 두는 것이다. 일종의 서식을 만드는 작업인게다.
그 다음 한달 여 간 쌓인 신문지 날씨 지면을 펴서 날씨를 기록한다. 해당 날짜의 신문이 없는 경우에는 우리집 바로 옆, 고모가 운영하시는 슈퍼마켓에 가서 날짜 지난 신문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때때로 날씨가 있는 날짜를 기준으로 일기를 써야 하는 날짜를 바꾸기도 하고, 또는 이렇게 애를 써 가며 자료 수집을 했는데도 날씨가 없는 날짜의 일기는 과감히 포기한다. 일종의 구성이다.
자, 기본 그릇이 만들어졌으니 빈 공간에 담아야 할 소재를 궁리한다. 방학 기간 동안 내가 무얼 했나, 어디를 누구와 갔나 자문한 뒤 내 머릿 속에 담겨있는 영상을 파노라마 처럼 주욱 나열해 본다. 날짜가 확실한 이벤트부터, 이를테면 수영장이나 눈썰매장 등 여행을 갔던지 혹은 누구의 생일처럼 엄마 아빠에게 확인하면 오류가 있을리 없는 날의 소재를 선정한다. 그 외 나머지 기억들은 날짜 상관없이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나름은 소재 나열에 있어 다양성과 짜임새를 고려하며 제목칸을 채운다. 나름의 편집기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문 스타트. 무엇을 했다, 어디를 누구와 갔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류의 사실과 그래서 나는 어떠했다, 이러한 느낌이다, 앞으론 이래야지 저래야지 순으로 사실 인과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매우 자기성찰적인 글을 쓰는 것이다. 집중해서 다섯 여섯개 연달아 쓰다보면 종이 위엔 연필을 꼭 쥐어잡은 손이 빚어낸 작고 예쁜 궁서체가 새겨져있고, 내 손바닥엔 빨간 초승달이 세 개나 떠 있다. 한번에 다작을 하다보니 힘이 바짝 들어간 손은 손톱을 눌러 결국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한 페이지 가득한, 빈 줄 없는 산문 형태의 일기는 어렵다. 가끔 꼼수도 부려본다. 적당한 자리에 행간을 두어 빽빽히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동시에 도전한다. 최대한 느낌을 싣고 리듬감을 살려가며 쓰고, 비어진 자리가 무색하면 아주 심플한 스케치로 자리를 채운다. 구름, 하트, 꽃 등 색연필로 쓰윽쓰윽 쉽게쉽게 그릴 수 있는 것으로 초 1학년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일러스트라 말할 수 없는 그림 낙서.
드디어 개학날 디데이. 밤 12시가 지나도 나의 밤샘 작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새벽 한 두시 정도 즘 되어서야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삼분의 일, 또는 반 정도로만 꾸역꾸역 칸을 채우며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든다.
마침내 동이 튼 아침, 공들여 쓴 일기장을 넣은 책가방을 메고 어설픈 만들기 작품을 들고 학교 가는 길. 잠에 취한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싱숭생숭 복잡하다. 방학 끝난 개학은 싫지만 오랜만에 단짝 친구와 선생님을 본다는 건 설레고 좋은 일이니까.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아이들을 힐끔거리게 되는건 왜인지. 특히나 만들기 과제를 건축학도 미니어쳐 졸업작품 저리가라 수준으로 완성해온 아이들을 볼 때면 부러움과 시기질투 반반 섞어 못난이 인형의 내가 되어 있기도 했다. 만들기 과제 상장은 내 손에서 떠났구나 결론 짓고 섣부른 미련 따위는 두지 않는다. 그리고 새초롬하게 두 권을 묶은 일기장을 선생님께 제출하러 가는 그 짧은 길- 2분단 둘째줄에서 교탁까지-은 어찌나 떨리는지. 선생님이 나의 일기에 어떤 답을 해 주셨을지 너무도 설레고 기대되고 심장이 콩닥콩닥거리는 기분... 요즘 얘기로 치자면 이른바 댓글 호응도를 기대하는 그 기분.
참 열심히도 썼다. 편집된 기억의 짜집기일지언정 열 두살, 열 세살의 나는 그랬다.
꽤 열심히 기록된 나날들, 내 필체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일기장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동생 방이 되어버린 그 곳엔 초6학년 어린이 일기장 두 권만 자리하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의 한 페이지. 담임샘 깨알같은 댓글 한 줄 한 줄에 울고 웃었던 그 때...
201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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