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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호호 불어 티타임을...

- 작은 찻잔은 언제나 나보다 크니까요. 코로나 블루 탓에 모두가 정신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요즘 체감하는 단 하나의 기쁨을 찾자면, 바로 하늘을 보는 일이다. 계절의 흐름 앞에 바람의 결도, 하늘빛도, 구름의 얼굴도 매 순간마다 달라진 가을이니까. 절로 감탄하는 순간을 담으려고 손엔 늘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찰나의 신비로움이 작은 프레임 안에 온전히 들어올 리 없지만 자연이 내어주는 그 품을 하늘 빛깔과 구름무늬로 아주 잠시라도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면서도 찬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리곤 한다. 얼음 들어간 시원한 커피와는 이미 안녕을 고했고, 아직까지 여름옷을 입고는 있지만 이따금씩 카디건을 꺼내 어깨에 걸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요 며칠의 풍경. 아..

mono + log 2020.09.22

한 사람의 손글씨가 주는 모든 것

단 하나, 단 한 번의 진심이 여기에...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은 시간. 책장을 훑어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책 한 권. 표지를 넘기자마자 ‘툭!’ 하고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진다. 선명하고 강렬한 빨간색 편지 봉투다. 손에 집어 들고 편지봉투를 만져보니 봉투 크기보다 작은 크기로 접힌 종이의 질감과 두께감이 느껴진다. 그냥 비어진 봉투가 아닌 것. 누가 보낸 편지였을까. 새벽, 두 시의 감성인지 몰라도 혹시라도 열지 말아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면 어쩌지 망설이던 사이에 주저하는 마음보다 먼저 손이 움직이고 있음을 본다. * 고민 한 톨 없이 본능적인 감각이 직진한다. 편지 봉투를 열고, 반듯하게 접혀있는 편지 종이를 펼친다. 감정 가는 대로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는 손글씨 보내는 이의 이름도 없는 편지. ..

mono + log 2020.09.08

기억의 지도 속 너에게 간다

올드 타운 걸, 뉴타운에서 옛. 집. 찾.기 기억 속 지도를 펼쳐야 찾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 나의 유년시절 전부를 품은 그 동네, 지금은 새로운 동네가 지어져 사라지고 없는 곳. 새 동네는 말 그대로 ‘새롭게’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름을 바꾸면 새 이름을 계속 불러줘야 차츰 익숙해져 운도 새롭게 트인다고 하던데 난 그 새로운 이름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건 지하철 역명뿐, 어릴 적 한 동네 살던 지인을 만나러 어쩌다 한 번씩 갈 때마다 마주하는 풍경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옛정을 추억하려던 기억 세포들마저 차가운 도시가 뿜어대는 아우라에 기가 팍 죽어버리는 기분이랄까.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숲과 번쩍이는 외관의 쇼핑몰 앞에서 30년도 훌쩍 지나버린 시절 일기를 복기하..

mono + log 2020.08.28

자기소개, 준비되셨습니까? _ 영화 <인턴>을 보다가

영화 (2015) 인트로를 통해서 ‘나’를 다시 보다 주방에 들어서기 전, 마음을 리셋하는 의식 중 하나, 넷플릭스로 영화 을 틀어놓는 일이다. 한참 전에 본 영화인데 최근 들어 무한 리플레이한 지 거의 두 달째. 주방일을 하며 서서 끝까지 보고 듣는 건 아니고, 요리나 설거지를 마칠 무렵까지 마치 조각 케이크 먹듯 영화를 한 조각씩 나누어 며칠에 걸쳐 반복해서 보고 있다. * Freud said,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 프로이트는 말했죠. 사랑과 일, 일과 사랑. 그게 전부라고. * 영화는 도입부가 정말 진국이다. 센트럴파크(!)의 초록 초록한 나무 풍경으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고, 단체로 요가를 하는 사람들 사이로 벤(로버트 드 니로)의..

scene + log 2020.08.18

아무 조건 없이 내가 되는 시간

“소소하고 사사로운 시간과 기억을 수집합니다” 틈틈이 쓰고 싶은 글을 기록해두는 블로그를 소개하는 짤막한 글이다. 검색의 파도를 통과한 누군가 잠시 머물다가도, 때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곳. 대개는 소리 없이 고요함을 유지하는 차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을 잠식한 코로나로 인해 두 아이를 끼고 있는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내가 사랑하는 하루의 ‘틈’마저 실종된 몇 달을 보냈다. 끼적거리다가도 이내 곧 미완성인 채로 체념하고 포기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매일 빈 종잇장을 마주하고 구름 속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은 몹시 고달픈 일이다_ 트루먼 카포티 이따금씩 들이치는 단상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을 뿐. 정제된 글 한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조바심과 함께 부작용도 ..

book. paper + log 2020.08.10

몸에도 단비가 필요하다

* 장마 꿉꿉하고 습한 장마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있다. 근래 들어 이렇게까지 ‘장마다운’ 해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6월 중순 무렵도 아니고 보통 때라면 쨍쨍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피해서 휴가를 고민할 7월 말인데. 하기야, ‘보통 때라면’ 혹은 ‘평소대로라면’ 이라는 말은 포스트 코로나를 통과중인 지금 아무 의미없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비가 오고 습한 날이면 뼈마디가 쑤신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내 얘기가 될 줄이야. 요 며칠 뒷목과 어깨, 양손 팔이며 손 끝 마디 마디가 뻐근해 틈 날때마다 요가를 모방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달래던 중이었다. 종아리 아래는 딴딴하게 뭉쳐서 천근만근... 습한 날씨에 장판 바닥에 발을 디딜 때면 쩍 쩍 달라붙는 소리에 나무로 된 마루였으면 좀 나았으려나 잠시 생..

book. paper + log 2020.07.30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장편소설 |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2020)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 몰입하면서 나는 모든 걸 잊는다. 낭독을 마치는 순간, 나는 망각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온다. 씻기고 정화된 채로 행복한 현실로. 나는 피키에 씨와 얼싸안을 것이다. 지금은 서로 악수를 나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은밀하게 통하는 공모자들이다. / (p.45 중에서...) * 책을, 글을 읽어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는 이를 기억한다. 기억을 잃은 아내 앨리 곁에서 젊은 시절의 일기를 읽어주던 남편 노아가 나오는 영화 책을 듣는 시간에 푹 빠진 잠 못드는 마르셀을 위해 침대맡에 앉아 책을 읽어주던 엄마의 목소리 ... 사실 낭독은 일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성우 못지 않게 낭랑한..

book. paper + log 2020.07.29

어느덧 10년

어제는 엄마께서 거의 10년을 근무한 직장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윤이 태어나고 1년을 봐주신 뒤 준비해서 들어간 직장이다. 평생 자영업만 하시다 전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올해로 열 살이 된 하윤 나이만큼 경력을 일구어 내셨다. 당시 나는 아이 돌을 치르고 나서 일을 계속하고 싶어 엄마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엄마의 선긋기는 확실했다.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할머니가 키우면 모지리 된다.” 조부모 양육에 대한 비하 발언도 아니고, 엄마께서 자신없다 말하던 것도 아니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다. 선을 넘으려던 나는 머쓱해짐과 동시에 엄마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고 인정했다. 엄마에게도 소셜 라이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몸이 병들고 기억마저 흐릿해진 어른을 돌보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엄..

mono + log 2020.07.01

안녕, 6월...

두 아이가 등교, 등원을 마친 오늘 아침. 정확히 네 달만에 맞는 나홀로 타임은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고. 점심 지나면 1호님 복귀하니 여유도 잠시다. 커피를 내려 얼음 가득 넣은 잔에 담아 들고 거실 책상 앞에 철퍼덕 앉고는 며칠 고민하던 꽃 예약 주문을 마쳤다. 거의 10년을 일한 직장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앞둔 엄마께 드릴 선물이다. 퇴근 시간 즈음엔 장맛비가 쏟아질 것 같고 편히 집에서 받으시는게 좋을 듯 하여 내일 아침으로 하루 늦추고, 꽃집 사장님께 메시지 픽도 함께 부탁드렸다. 너무도 오랜만에 애들 책 아닌 내 책(!)을 꺼내들어 책장을 넘기는데 낱낱의 글자들이 공중부양하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머리속에 딴 생각들만 자꾸 차올라 결국 책장을 덮고 말았다. 노트를 펼쳐보니 필사도 3개월 전을 끝으..

mono + log 2020.06.30

[체리토마토파이] 아흔살 잔 할머니의 일기장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청미출판사(2019.3.20) - 책 속에서 - 3월 20일 금요일 봄의 첫날 하루를 밖에서 보냈다. 오늘 아침, 잠시 텃밭에 나갔다. 과실수에 꽃이 피었다. 창틀 옆 복숭아나무에는 분홍 꽃이 피었고, 빨랫줄 맞은편 벚나무들도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꽃이 다 피었다. 지난달에 정원사가 나무딸기와 까치밥나무 가지를 정리해두어서 아주 보기가 좋다. 그가 아스파라거스 고랑에서 잡초도 다 뽑아놓았는데 올해 소출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고, 5월 초까지 기다려봐야 한다. 나는 아스파라거스 수확할 때가 정말 좋다! 재미도 쏠쏠하고, 하얀 순을 잘 보고 줄기가 부러지지 않게 흙을 살살 훑어내리면 눈썰미도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작년엔 아스파라거스가 잘 안됐다. ..

book. paper + log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