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사이에 극장 외출이 두 번이나 있었다.
주말엔 설국열차에 올라타고, 오늘은 음울한 미스테리극에 초대되었다.
나홀로 설국열차 탑승기는 참으로 경이로웠다.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기억이 안 날만큼 극장과 나 사이는 꽤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류에 뒤쳐짐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고자 한동안 영화는 집에서 편하다 못해 한없이 질펀하게 늘어져 VOD를 찾아보는 걸로 대체했다. 그러다 마음 먹고 급한대로 티켓을 예매하고 지정된 나의 자리에 앉아 관객이 되어보니 정말 오랜만에 낯설다가, 조명이 꺼진 뒤엔 설레고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시작도 전에... 촌스럽게 말이지...
오늘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또 달랐다. 이 역시 오랜만의 공연장으로의 외출이다. 얼.마.만.인.가. 굳이 강조하고 싶진 않지만 그만큼 의미가 크다. 이 느낌 아니까~ 이젠 스스로에게 자주 외출을 허하겠노라-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나의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는 없었다. 유명 뮤지컬 메리 포핀스와는 다르다는 것 빼곤.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다. 설국열차를 타고 내리면서 무수히 쏟아지는 담론과 해석에 피로도가 몰려오기도 했고,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작품을 보고 싶었다. 최근 몇년간 이 분야와는 담을 쌓고 산 결과 나의 감각을 초기화시키기 위해 좀 억지를 부렸다. 추가적인 정보야 나중에 보면 되잖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객석에 앉았다.
#1. 암전. 커튼콜 뒤로 네 명의 그림자가 이동한다.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아주 잘 짜여진 동선과 각도로 그림자는 여기에서 저기로, 앞으로 뒤로, 커졌다 작아졌다, 가로로 세로로 줄지어 겹쳐지며 진한 잔상을 남긴다. 도대체 네 남매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2. 1926년 그 날, 집에는 불이 났다.
아버지는 죽었고, 유모 메리는 전신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네 아이를 구하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네 아이는 각기 다른 집에 입양되어 어른이 된다.
#3. 무대 그리고 조명. 어두 컴컴한 한스의 방.
중앙엔 커다랗고 네모난 책상이 뒤엎어져 있다. 거꾸로 솟아있는 세 개의 책상 다리. 네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는 네 개의 의자. 천장의 네모진 앵글. 네 개의 축을 갖고 회전하는 무대는 한 명 한 명의 기억이 나지 않는, 기억 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오는 장치이자 배경이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지긋한 과거의 궤도를 암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저 너머 보이는 진실의 문. 진실은 무엇일까.
(거꾸로 솟아있는 책상다리 기둥은 네 개가 아니라 세 개이다. 시선의 답답함 때문에 연출을 그리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4. 노래와 몸짓. 감정선을 가장 극대화하고 있는 뮤지컬 노래와 현대적인 무용이 참 디테일하게 녹아져있다. 유약한 인간 내면과 상처입은 영혼, 가슴 아프게 찢겨진 고통과 정신적 고뇌는 마치 수화로 이야기를 걸듯 배우 자신을, 인물 자신을, 그리고 관객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랄까. 안나와 헤르만의 듀엣은 참으로 애잔하고 애틋하다.
#5. 이야기.
Silence Wednesday
12년이 흐르고. 한스는 그 날과 관련한 수사일지를 훑어보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고군분투한다. 어느날, 그 앞으로 죽은 형사가 남긴 아버지의 수첩이 전달되고. 더듬으며 사건 당일 벌어진 일에 대한 조각난 기억 퍼즐을 맞추려 한다. 동생들을 초대해 각자의 기억을 불러오려 하지만, 한 명 한 명의 고통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마음 깊숙히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다.
"수요일에 사라지는 기억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어..."
실험당하고 최면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강한 갈망이 있었고, 안나에게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상처가 있었다.
동의합니다
불행했던, 지우고픈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지 않고 삶에 함께 동행할 것을.
어릴 적 작가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공황장애를 앓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슴 깊이 꾹꾹 눌러 살아야만 했던 막내 요나스가 먼저 말을 꺼낸다.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나지막한 선언 후에야 비로소 얼굴에 평온이 드리운다.
#6. 순수 창작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미리 좀 찾아보고 갔으면 뻔히 알았을 정보였다. 독일 나치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번안극인가 싶었던 것. 정말 내가 객석에 다시 오기까지 꽤 많이 멀어졌었구나 되짚어본다.
- 극본 작곡 연출 : 서윤미 / 프로듀서 : 김수로
- 김수로 프로젝트와 서윤미 연출(뮤지컬<늑대의 유혹> 연극<밀당의 탄생>)의 만남으로 화제가 된 이 작품은 지난해 5월 첫 선을 보였다.
- 2012. 5월 초연 당시 제18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베스트창작뮤지컬상, 연출상, 극본상, 음악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 및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창작뮤지컬지원사업 작품으로 선정
- 공연은 2013.09.29까지 계속된다.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
7. 김수로 프로젝트
김수로 프로젝트는,
배우 김수로가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한 아시아브릿지 컨텐츠의 공연 연작 프로젝트로
1탄 연극 <발칙한 로맨스> 2탄 뮤지컬 <커피프린스 1호점>
3탄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4탄 연극<이기동체육관 앵콜>
5탄 음악극<유럽블로그>를 연달아 무대에 올리며 2012년 말 누적 관객 15만을 기록했다.
20130.08.13(Tue) CAST
Hans_이경수
Hermann_김성일
Anna_문진아
Jonas_김도빈
Mary_홍륜희
덧붙이며...
극본 연출 연기 음악 무대장치 조명, 그 최상의 합은 일관되게 음울한 분위기 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중극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객석은 거의 다 들어찼고 흐트러짐없이 몰입되었다.
"우린 각자 모서리에 앉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어"
관객의 숨소리마저 죽은 그 암흑의 공간에 뱉어진 대사가 계속 머리속을 빙빙 돈다.
뒤통수를 맞은 듯, 아니 마치 나의 모습을 들킨 듯한 당황스러움에 소름이 끼쳤다.
"방문을 열어 기억을 넣고 멀리 도망쳐"... 불구덩이에서 메리는 외친다.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될 걸 알면서 아이들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수단인 최면을 걸어준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그 끝은 또 다른 고통으로 통하는 문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남아있는 한 슬픔은 계속된다. 다 나은것 같던 상처도 다시 덧나고 또 덧남을 잘 안다.
내 기억의 방을 들여다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과 기억만 몽땅 쳐박아 둔 시궁창같은 기억 창고의 문을 열고 그 속에 있는 그대로, 있지 않은 그대로 그냥 두는 것 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조금씩. 그 동행은 이제 시작-
2013.08.13 블랙 메리 포핀스 @이해랑 예술극장
초대해 준 그녀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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