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어
팻 허친즈 그림·글 | 시공주니어
2학기 첫 리딩맘(책 읽어주는 엄마) 활동을 마치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 시원하게 바람이 분다. 덥지도 차갑지도 습하지도 않게 딱 좋게 선선하게... 아이 친구들이 많이 있는 반에 처음으로 책을 읽어주자니 적잖이 긴장하고 이마며 겨드랑이며 땀이 송송 맺혀있던 찰나, 때 마침 부는 바람은 내게 이른 아침 수고했다며 말을 건네는 듯하다.
아침 일과를 위해 새벽 6시 반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시간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하늘빛은 흐리지만 회색 바람이 주는 청량함은 이번 달 들어 처음이지 아마. 여름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선풍기와 폭염을 잠재우던 냉기 백프로 초강력 에어컨 바람에는 없는 무늬와 결을 지닌 자연 그대로의 바람이 분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흐름을 완곡하게 잇는 이음표라도 달고 있는 걸까. 바람이 지나간 길 위엔 점점 여름의 끝을 의식하는 가을의 질감이 옅게 드리운다.
회색 하늘 아래 바람을 맞다보니 오늘따라 유난히 떠오른 책이 있다. 영국 작가 팻 허친즈의 글 그림으로 유명한 [바람이 불었어]. 변덕의 끝을 보여주는 영국 날씨 만큼이나 짓궂은 바람의 장난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화이트 씨의 우산이 뒤집히고, 꼬마 프리실라의 풍선이 날아가고, 남일인 듯 구경만 하던 신랑도 모자가 날아가고 우편 배달부의 편지들 마저 하늘로 휘휘 바람에 뒤섞인 채 날아가 버린다.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생각나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된다. (일전에 포스팅 한 적도 있는데...)
결혼식장에 바람이 휘몰아쳐 드레스가 뒤집히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하객들도 빗물에 홀딱 젖어 생쥐꼴에 컵케이크 장식도 무너진 데다가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막이 찢어져버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영화 어바웃 타임 속 문제의 결혼식 장면. 말도 안되게 비현실적이지만 영화니까 이해되고 영화니까 진정(레알) 로망을 꿈꿀 수 있는 게 아닐지...
그림책 보다가 인생 영화도 떠올리고 울고 웃을 수 있던 시간. 또 하나의 반짝이는 선물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
'book. paper +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를 위한 케이크 (0) | 2018.09.11 |
---|---|
When YOU Were small _ 네가 아주 어렸을 때 (0) | 2018.09.11 |
버텨내어 좋은 일 투성이 (0) | 2018.09.03 |
하늘에서 본 지구 이야기 (0) | 2018.08.29 |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0) | 2018.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