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2018)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외롭고 쓸쓸한 풍경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불빛이 켜진 도시 속에, 말할 수 없는 아린 상처를 감추고 돌아갈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한 인간의 뒷모습이 보인다. 소설가가 끌어안고 눈길을 주던 무수히 많은 풍경의 조각들이, 작가 자신과 가족과 친구와 이름 모를 노인과, 사랑하는 그 어떤 것들, 그리고 활자 속의 또 다른 작가들의 뿌리에서 자라난 이야기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이 책을 읽고 남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밖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요약된 단 하나의 문장이기보다는 저마다의 숨결이 담긴 풍경화의 이미지다.
“길고 긴 독서 끝에 남는 건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다.”
(불가능한 아름다움, 294페이지)
무릎에 올라앉은 딸아이에게 아빠는 책을 만드는 거라고, 아빠의 살붙이들과 보낸 어린 시절과 고향과 고향 사람들이 담겼노라고 이야기 해주었다던 작가의 말에서, 늙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겐 살갑지 못했던 외동아들의 모습이 언뜻 보인다.
불혹이란 나이에 딸이 태어나던 날 손바닥으로 두 개의 의지가 지나갔다고 고하는 대목에서 작가 역시 남자에서 아버지로 제 자신도 새로 태어났을 거라고 헤아려본다. 온 마음을 다해 딸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을 떠올리면 작가 또한 딸바보가 아닐 리 없고, 딸도 마찬가지로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일테니 언젠가 아빠의 이야기를 읽어주리라는 희망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말을 건네고 싶다. 나름의 언어와 생각으로 아빠의 말을, 활자로 남긴 글을 읽어줄 피붙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지.
[1부, 절망을 말하다]를 채우는 글들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이해할 듯 하다가도 아직은 어려운 풍경들을 본다. 각각의 주제별로 단편 단편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태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하나의 장면, 하나의 기억, 하나의 인물들이 고스란히 롱테이크로 기록하듯 꼼꼼하고 섬세하게 빛을 발한다.
어린 시절 나는 한 마리 소를 사랑했다고 첫 글을 떼는 산문집의 시작은 독자를 한달음에 작가의 고향으로 이동시키며 작가의 시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 어떤 그림보다 더 치밀하고 빈틈없이 한 마리 소를 그려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소에 대해 느끼는 애증과 배신과 존경과 애틋함의 감정선을 다양한 음폭을 내며 글자로 쏟아낸다. 소설이라는 걸 쓸테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저 소가 써버린걸요.” 이렇게라도 글에서 밝힌 건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소가,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이,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일체의 이야기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자신은 주워 담는 것뿐에 불과하다는 것. 그저 여전히 소설가를 꿈꾸는 소설가가 토해내는 끝없는 자기 성찰의 결과의 본질이다.
손가락을 잃고 나서 논을 팔고 트럭 행상으로 십여년을 보낸 뒤, 조경일을 돕다 추락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러한 위태로운 순간마다 가슴이 벌렁벌렁거려 저 멀리서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어머니를 보며 작가는 불안에 떨며 절망하는 인간을 본다.
고모의 부음을 전해 듣고 고향에 내려가 가족들이 초상을 치르는 장면을 마주한 작가는 분주한 가운데 정적이고 고요한 풍경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인물에 대한 눈길과 마음 씀씀이가 각별하다. 외동아들로 자라 작가는 안방에 앉아 염을 하는 고모부와 눈물을 삼키는 셋째형의 퉁퉁 부어버린 눈을 보고,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고모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백년 동안의 고독」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난 이 대목에서 향년 102세로 영면하신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고의로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 날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거였다. 서울은 축축하고 기나긴 여름 장마였고, 고창 시골집은 뜨거운 뙤약볕에 땅도 하늘도 이글이글 달아오르는 무더위 속 한가운데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하고 고요했던 이별의 장면. 곡기를 끊으신 지 꽤 여러 날이 지나고, 오랫동안 깊게 깊은 잠을 자듯 누워있는 할머니 곁엔 막내 고모와 아빠가 있었다. 할머니는 방에서 기나긴 잠을 주무시고, 거실에선 온 식구들이 모여 밥을 지어 먹고 과일을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앞마당에선 내 아이가 꺄르르 웃어가며 빨간대야에서 물놀이에 여념없던. 세 개의 그림이 마치 영화 속 롱테이크, 느린 화면으로 지나가던 그 날......
[2부, 문학은 네가 선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에서는 눈덮인 산사와 경주의 폐사지, 끝여름과 가을무렵의 터키 이스탄불 여행지와 감옥에서의 백일에 대한 단상을 담은 글들이 펼쳐진다. 집을 벗어난 세상 밖으로의 여행과 철저히 고립된 세계로의 여행은 너무도 철저히 다른 성질, 다른 질감의 공간에서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은 있는 그대로의 수수한 정경을 쓰다듬는다. 풍경은 풍경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고유의 온기를 담아내며 교감하는 느낌이랄까.
눈은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 지상의 결을 따라 쌓입니다. 솟으면 솟은 대로 꺼지면 꺼진 대로 더러운 곳이나 정갈한 곳이나 가리지 않고 쌓입니다.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내리면 그곳이 수행처이기 때문입니다.
(겨울 봉건사, 98페이지 중에서)
내가 걷는 쪽은 산그늘에 푹 담겼으나 빈터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 아래부터는 햇살이 그늘보다 두텁게 펼쳐졌다. (...) 오른편 산등성이를 넘어온 햇살이 반대편 계곡으로 흘러내리며 잠에서 깨어나 우중우중 선 소나무들을 씻기는 중이었다.
(경주 남산 폐사지, 102-103페이지 중에서)
내게 여행이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 잠시 주저앉아 높이가 다른 세상을 일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익숙한 세계가 순식간에 낯설어지고 낯선 세계가 하염없이 밀려들어와 뜻밖의 사건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나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
하루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증발하기를 되풀이했다. (...)
이스탄불의 어느 거리 어느 골목에 있더라도 과거와 현재가 깍지를 낀 듯한 기분이 들었고 역사를 과거에 대한 서사쯤으로 치부하는 관습이 그곳에서는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졌다.
(이스탄불에서 마음을 놓치다, 111-112페이지 중에서)
며칠 뒤에 우리 방은 산산조각이 났다. 백일전방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가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홀로 남은 나는 비로소 그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허투루 흘러간 게 아니었음을, 나도 모르게 그들의 체취에 길들었음을, 이해될 듯 말 듯 한 아련한 교감으로 그날들을 보냈음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곳에서 부대끼며 그이들과 지낸 시간이 다시는 재현되지 못할 과거가 되었음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느끼는 데에는 백 일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백 일이면 충분해, 131-132페이지 중에서)
[3부, 수많은 밤들의 이야기]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작가가 고뇌한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은 방으로 밤이 쏟아져 들어오면 비로소 열리는 또 다른 세계에서 작가는 자신의 내면과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며 글쓰기 또한 독서도 그러한 행위라고 써 내려간다. 그런데 실상은 독서가 괴로운 행위였다고 고백한다.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읽지 않을 수 없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니까. 그래서일까. 책 속의 대출기록부를 들여다보며 책의 내력을 엿보는 일도, 타인의 독서 취향을 견주어 보는 것도 작가의 시선에 들어온 풍경에 닿는 눈길의 씀씀이가 헤아려진다.
도서관의 주춧돌처럼 오랜 세월 반쯤은 땅에 묻힌 채 반쯤은 지상에 드러낸 채 낡아가면서 단단해지는 독서의 시간들이 어서 오기를. 내가 남겨두고 가야 할 책들과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은퇴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은퇴하는 소설가, 147페이지 중에서)
책은 더러워지기 위해 순결하게 태어났다.…… 작가도 그런 존재다. 사람의 손을 타지 못한 채 낡아가는 책이란 얼마나 비장한가. 그러니까 빈칸이 많은 대출기록부를 가진 책은 찾아주는 이 없는 방에 소설을 쓴답시고 틀어박힌 지금의 나와 닮았다. (대출기록부, 149페이지 중에서)
소설가가 된 이후로는 도서관에서 한국소설 코너 서가를 피하게 되었다지만, 어느 날엔가 자신의 책을 꺼내어 가슴에 품었다가 다시 서가에 내려둔 걸 보면 작가도 사람이구나 싶어 슬쩍 미소가 지어진다. 익명으로 남아야 할 독자를 위해, 독자와 만나기 위해 존재하는 책에 대한 예의였을까. 소셜미디어상의 ‘좋아요’ 숫자만으로도 호감도와 취향을 빛의 속도로 알아차릴 수 있는 시대이긴 하지만, 아마도 작가는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의 소통에는 눈길을 주진 않을 듯하다. 험한 손길이 닿은 책이더라도 은행잎 책갈피 하나에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시집을 꽂고 다니기에 바바리코트를 좋아하는 감성 문학도임이 분명하니까.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편에 모아진 글들은 참으로 진중하게 모든 걸 어루만지고 있는 글귀들이 많아 가장 밑줄이 많이 그어진 페이지들이다.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문장을 꼽자면 작가의 부모님이 과거에 살았던 셋방집을 찾아가는 장면 속에 있다. 그들은 순전히 기억이라는 단서에 의지해 찾아간 곳에 몇 안 되는 단서를 기억하는 어른들의 기억을 빌려 가고자 했던 과거의 장소에 도착한다.
노부인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마당으로 내려앉은 한줌 햇살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
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기억의 크기, 241페이지)
너무나 선명하게 영화 같은 장면이라 이야기도 이미지의 잔상도 오래 남는다. 왜 그토록 특별히 마음 깊이 그 풍경이 머물렀던 것일까. 과거의 장소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추억으로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텐데. 그곳이 정말로 존재해서 다시금 찾아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의 유년시절은 오로지 기억의 지도에서만 꺼내볼 수 있는, 이미지만 남은 풍경의 조각에 불과하다. 재개발되어서 완전 새로운 동네가 되어버린 곳, 초입에 들어서면 화려한 쇼핑몰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고, 저 멀리 병풍처럼 산 머리가 펼쳐지긴 하지만 그 밑으로는 아파트 건물로 빽빽한 회색 숲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이미 새로운 땅 위에 묻혀버린 과거의 장소에 나도 작가처럼 찾아갈 수 있었다면 어른이 된 지금 마주하는 풍경이 기억과 꼭 같을리라는 보장은 없다. 작가의 말처럼, 내가 기억하는 건 결국엔 나의 사람과 그 시절 내게 다가온 각기 다른 색채의 사랑일 것이다. 정말로 궁금해하는 건 그 때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그 공간이 아닌, 내게 의미있던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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