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 log

그냥 아주 작은 배려

greensian 2013. 9. 25. 15:48

미칠듯 쏟아지는 졸음과 메스꺼움, 만삭의 무거운 배와 힘겨루기 하던 임산부 시절을 거쳐 만 두돌하고도 삼개월 지난 아이를 키우는 지금까지 나는 주로 버스, 지하철, 마을버스 등 대중교통을 애용해왔다. 아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다소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대체로 편리하고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킬 수 있기 때문. 낮 시간대에는 버스 좌석 중 분홍색의 임산부석이 비어있거나 지하철에도 노약자석 및 일반 좌석에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 이용이 한껏 수월하다.

 

기사와 승객들의 배려와 친절 마인드 또한 기본 이상이다. 돌 전후로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다닐 때든, 지금처럼 걸을 수 있지만 힙싯에 앉혀 데리고 다닐 때든 버스나 지하철에 여유 좌석이 없는 경우 아이를 낳고 키워본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먼저 양보를 해 주신다. 가끔은 연세 있으신 할머니나 할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워주시면 감사함과 죄송함에 정중히 거절할 때도 있다. 암튼 이렇게 많이 이용하는 만큼 만족도도 꽤 높다. 제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8-9점!

 

보름 전쯤. 이 아름다운 점수표에 먹칠을 한 일이 있었으니. 울 동네 마을버스 기사아저씨 한분 때문이다. 화정역 은빛마을을 거쳐 달빛마을 안까지 가는 마을버스 27번을 운전기사다. 아무래도 이 분과는 내가 인연이 별로인가보다. 다른 기사분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이어 그런지 힙싯에 아이를 안고 타든, 아이를 먼저 태우고 휴대용 유모차를 싣는 동안에도 기다려주셔서 안전하게 착석한 뒤에 버스가 출발했다. 심지어 내릴 때는 아이 챙기라고 유모차도 내려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의 이 기사님은, 이 날까지 두 세차례 정도 원래의 버스정류장 위치에 버스가 서지 않아서 내가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미열기가 고열로 올라갈랑 말랑 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병원으로 가려고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원래 정류장 위치에 서지 않고 일찌감치 서버리고는 할머니 셋을 태우고 출발해 버리는 거 아닌가. 내 손에는 우산도 있고 얼집 가방에, 가장 중요한 아이의 손도 있다. 아이를 안정적으로 안을 여유가 없어 어정쩡하게 안고 버스가 먼저 서버린 쪽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겼다. 슬쩍 보니 나와 인연이 없는 불운의 기사아저씨. 오기가 발동하기 전에 그냥 버스를 보내기로 했다. 아이를 안고있는 내 자세도 불안불안 하거니와, 굳이 쫓아가서 탈 여력도 없었다. 기사 아저씨가 나와 아이를 보고 서면 타자 했는데 마침 내 앞에 버스가 선다. 힘겹게 아이를 먼저 태우고 나도 버스에 간신히 올라탔다.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대며 "버스 정류장 저기 아닌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묵.묵.부.답. ....... 1차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이 아저씨, 지난번에도 똑같이 원래 정류장 전에 서버리고, 내가 탔을 때 같은 질문을 하니 아무말씀 없던 분이다.

 

역시나 어정쩡하게 한 손으론 아이 손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좌석 옆 기둥을 잡자마자 차는 출발. 헉!!!!!! 내 앞에 있는 아주머니가 우리가 불안해보이셨는지, "아이 나한테 주고, 거기 빈자리에 앉아요" 하신다. 그러는 중에도 버스는 움직이고 있다. "아니예요. 이따 멈추면 제가 아이랑 빈자리로 갈게요" 하고 대답하고 버스가 잠시 멈추기를 바랬다. 잠시 뒤, 우리를 걱정하는 승객 몇분이 뒤에서 말을 건넨다. "애기 엄마, 거기 빈자리에 앉아요!" 그래서 내가 "네, 지금 버스가 움직이니 이따 멈추면 앉을게요."하고 뒤까지 들리게끔 대답했다.

잠시 후, 신호를 기다리느라 버스가 멈춰서 아이를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안정적으로 앉혔다. 휴우.. 오랜만에 비오고 습한 날씨라 난 구슬땀으로 샤워를 한 기분이다. 마침내 화정역에 도착. 아이를 안고 우산을 챙겨들고 내려서 지하철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기분은?! 오마이갓!!! 아이 어린이집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이다.  

 

혹시 버스가 출발했을까봐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되돌아갔다. 버스는 아직 출발 전. 난 기사 아저씨에게 "잠시만요 가방을 놓고 내렸네요"하고 올라탔고, 다행히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에 가방이 있어 들고 내렸다. 그런데 내 뒤통수로 들려오는 소리 "참 나!" !!!!!! 기사 아저씨의 기막혀하는 소리다. 분명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다. 헐. 뭐지?!!!!! 이건?!!!!! 무슨 의미일까?!!!!! 아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 차로 향하려고 뒤돌아 서는 순간, 차가 출발해버린다.    

 

!!!!!

짜증대폭발. 비도 오고 습한 가운데, 미열기 있는 아이 안고 온 몸에 땀으로 샤워중인 나. 버스 지나고 한참을 멍때리며 씩씩거렸다. 차분히 대응하자 차분히... 겨우 마음 가라앉히며 마을버스 회사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해당 요일과 시간을 정확히 체크해서 정리해두어야겠다고 폰으로 메모만 해 두었다. 원래 정류장에 서지도 않고, 승객의 안전을 체크하지도 않고 출발하고, 완전 비매너로 일관하신 그 분. 똑똑히 기억해.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의 말 한마디. "그러니까 택시타고 다녀.."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허탈하기 그지 없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구...

 

난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마을버스 회사에 전화를 하진 않았다. 그 기사 아저씨를 한번 더 보고 대응할 생각으로. 그 후로 몇 차례 마을버스를 탔는데 아직까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냥..아주 작은 배려다. 어린 아이와 함께 타는 엄마, 아빠들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 등등 모든 승객 한명 한명을 세심하게 생각하는 매너 말이다. 내 맘속엔 이미 그 기사아저씨에 대한 불신감이 꾹꾹 적립되어 있어 깨끗한 상태로 초기화할 순 없지만 한번 더... 두고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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