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per + log

[완벽한 날들_메리 올리버] 내 온쉼표의 요일들

greensian 2018. 11. 16. 22:57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 마음산책



‘엄마’가 된 순간부터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온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 둘이 이룬 ‘가족’이라는 커다란 우주를 품고, 새로운 행성에 정착한 어린왕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가면서. 서로 다른 자아들이 만나 각기 다른 정도의 성장통을 겪는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으니까.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왕자는 점점 살이 차오르고 경이롭게 성장하지만, 그 누구의 역할이 아닌 온전한 나의 모습은 점점 닳고 달아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엄습하는 날을 마주하곤 했다. ‘엄마’라면 마땅히 아름답게 품어야 할 거대한 우주에서의 하루하루가 버거울 때마다 쉬어갈 곳이 필요했다. 기댈 곳 없는 독박육아의 쉬는 시간은 아이가 낮잠에 들어야 비로소 시작되니 그 무엇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한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는 곳이 절실했다. 집만 아니면 됐다. 방구석만 아니면 됐다. 하늘빛이 흐리든 파랗든 집 밖으로 나와 공원으로 한 달음 달려가면 질감이 다른 바람과 온기가 다른 햇살이 내게 새로운 숨으로 다가왔다.

*



아이가 하늘을 마주보고 초록빛깔 바람을 맞으며 스르르 눈이 감겨 안락한 유모차에서 단잠에 빠질 무렵, 그제야 겨우 발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숨을 쉬어본다. 메리 올리버의「완벽한 날들」은 책임감의 성에서 빠져 나온 내가 그 어떤 역할의 옷도 걸치지 않고 숨 쉬는 시간을 근사하게 만들어 준다. 텅 빈 자아를 마주하고 공허했던 마음이 차츰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충전되는 기분이랄까. 작가는 날씨의 정도, 햇살의 농도, 날아가는 새, 풀숲으로 뛰어드는 개, 살랑거리는 바람 조각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교감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사색을 자유로이 풀어놓는다. 아이가 고요히 잠든 시간, 난 활자로 남겨진 메리 올리버의 사유의 시간을 은밀히 탐독하며 몰입한다. 나무, 숲, 바다, 하늘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내적 사색을 즐긴 작가의 언어와 시각이 있는 그대로 내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듯 전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케이프코드 끄트머리 항구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다가 돌아서서 멋쩍어하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정말 그렇다. 눈길 닿는 곳 마다 절경이다. 고속도로변 과꽃들과 미역취들의 천국의 빛을 받아 그 빛으로 스스로를 물들여 우리를 끝없이 이어진 장식 속에 머물게 한다.>>
_ 산문 ‘내가 사는 곳’ 중에서



문득 작가가 사는 곳 케이프코드가 궁금해진다. 바다와 거친 모래 언덕, 시가지, 새소리가 울리는 작은 크랜베리 늪도 있는 곳. 매사추세츠 주 남동부에 위치해 있고, 지도상에서는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는 케이프코드 만. 그 끝에 프로빈스타운이 있다. 휴양지로 인기가 많은 이곳에 대해 작가는 예술, 역사, 상업, 좋은 음식, 즐거움과 열기, 떠들썩함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사적인 천국’을 찾아옴을 싫어하지 않고, 자신이 누리는 풍경을 다른 모든 이들도 누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도시의 정신이 마음에 든다. 작가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머무르는 시간 동안 추억을 새기는 사람들을 조용히 응원한다. 말없이 곁을 내어주는 느낌이 들어 나 또한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쯤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마음에 새겨둔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함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_ 산문 ‘완벽한 날들’ 중에서



​Edward Hopper. Cape cod morning(1950)
​ ​케이프코드의 아침. 에드워드 호퍼


작가가 바라보는 아침 햇살 너머 끝에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케이프코드의 아침>이 겹쳐 보인다. 풍경과 교감하는 작가 메리 올리버의 작품집을 통해 좋아하던 화가의 작품과 연결고리를 찾게 되다니, 이 사소한 발견이 반가운 기분이다.

풍경과 교감하는 시인 메리 올리버는 매일 산책을 하고 늘 같은 풍경도 독보적인 관점으로 글을 썼다. 밤중 잠을 깬 빗소리에 위안을 느끼고, 잠시 머무는 빛에도, 작은 거미에도 키를 낮춰 시선을 마주한 시간을 적어 내려간다. 같은 그림, 같은 풍경을 본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담지 못할 특유의 감성이 담긴 문체로 마음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힘이 느껴진다.



산책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하트 모양의 나뭇잎들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이름도 모르지만 향기를 품고 너울대는 여린 잎들의 움직임에 반해,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사랑잎나무’라고 이름을 짓고, 그 이후로 틈 날 때마다 찾아가곤 한다. 나만의 아지트가 된 셈이다. 봄에는 온통 초록빛으로 충만했던 나무가 가을엔 노랗게 익어가고, 잎이 거의 다 떨어져 외로이 가지만 남은 나무를 지켜보며 ‘풍경과 교감’하는 작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본다. 이름을 알고 싶은 강력한 궁금증이 생긴 건 “나뭇잎이 하트 모양이네!”라고 말한 아이의 한마디 때문이다.

그 이름은 계수나무. 어릴 적 좋아하던 반달 노래에 달 토끼가 함께 등장하는 그 신비로운 나무를 만났다는 생각에 남몰래 얼마나 좋아했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며칠 전에도 공원을 거닐다 나의 노란 사랑잎나무를 들여다보고 왔다. 떨어진 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특유의 달달한 향기를 그득히 내뿜으며 생에 마지막까지 제 할 몫을 다 하고 있는 계수나무 한 그루. “나무는 잎을 억제하지 않고 때가 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돋아나고 스르르 떨어지게 한다.”라며 작가가 언급한 자연의 습관이 작동하는 그 순간조차, 난 그저 나무가 가진 기회들의 향연에 초대된 손님일 뿐. 고요한 응시와 사적인 교감이면 그걸로 충분히 즐거운 산책이다.


​<<분명 온 세상 시계들은 요란하게 똑딱거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달팽이는 창백한 뿔을 뻗어 이리저리 흔들며 손가락만 한 몸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 점액의 은빛 길을 남기며...>>
_ 시 ‘여리디여린 아침’ 중에서

우연한 계기로 아이가 나팔꽃 씨앗을 가져왔다. 새싹을 틔우고, 줄기가 자라고 자라 덩굴이 되어 꽃을 피우기까지, 나팔꽃과 함께 한 시간은 아이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느린 시간이기도 하다. 예쁘게 활짝, 가장 찬란하게 피어나던 순간, 꽃잎 끄트머리는 이미 여릿하게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꽃이 지고 나면, 진 꽃이 다시 피는 줄 알았다. 내일이면 다시 핀다고 아이에게도 당당히 말했는데...... 꽃은 그대로 서서히 가장자리부터 여리디여린 꽃잎을 오므리며 하루를 마치고 말았다. 나팔꽃에 대해 참으로 아는 게 없었다. 검색을 해 보니 피어난 꽃은 지고, 다음날 새로운 꽃이 핀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정말 그러했다. 꽃망울이 여러 개 맺힌 어느 날, 새벽 세 시 쯤 되었을까. 어둠이 깨지 않은 이른 새벽에 깨어 꽃의 기상을 몰래 지켜보았다. 전날까지도 완벽히 닫혀 있던 꽃봉오리가 슬며시 열어져 있음이 보였다. 아침이 오기를 인내하며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해 내고 있는 나팔꽃에 경이감이 일렁이던 순간이다. 아마도 메리 올리버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똑딱거리는 세상의 시간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달팽이를 보던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만 아는 고요하고도 긴, 혹은 짧다면 짧은 나팔꽃의 시간을 탐닉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10월의 초입, 안면도 여행지에서 큰 아이와 아침 산책을 했다. 올해 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는 아이유 누나가 부른 ‘가을아침’이 생각난다며 가사를 흥얼거렸다. (원곡자가 누구인지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난 기대치 못한 호사를 누리며 논길 가장자리에서 흐느적거리는 바랑이풀 하나를 뽑아 들었다. 우산을 만들어 아이에게 건네니 자기도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아이는 바랑이풀 우산을 꼭 쥔 채 흐리기만 한 하늘 위로 두 손을 쭉 뻗어본다. 날씨는 메리 올리버가 말한 ‘최소량의 날씨’가 아닌가 싶다. 날씨가 없는 날씨에 쉬운 산책이 좋다던 작가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지난여름, 끓어오르는 폭염에 얼마나 지루한 낮과 지친 밤을 보냈는지 기억하는 건, 차라리 망각이 더 쉬운 편인 듯하다. ‘여름밤’에 대해 밤은 너무도 길고 그 페이지들은 너무도 천천히 넘어간다고 한 시의 첫 문장은 꽤나 오래 기억에 머무른다. 어렴풋하게나마 참 더웠던 날로 살포시 접어두고 우리는 조금 이르게 찾아온 끝가을에 벌써 추위를 걱정하는 날 앞에 서 있다. 일상에서 고요한 자연을 만나는 순간, 내가 온전한 숨을 쉬는 시간...... 나의 완벽한 날들은 이렇게 온쉼표의 요일들이 모여 채워진다.